adikastos
갑판우와 조선지광 그리고 멘케의 미적 인간으로서의 인간학 본문
나지익 한 한울은 白金비츠로 빛나고 물결은 유리판 처럼 부서지며 끌어오른다. 동글동글 굴러오는 바람에 뺨마다 고흔피가 고이고 배는 華麗한 김승처럼 지스며 달녀나간다. ― 「갑판(甲板)우」176) 일부 나 는 차창 에 기댄 대 로 옥톡기처럼 고마운 잠 이나 들 자. 靑 만틀 깃 자락 에 매담 R의 고달핀 이 붉으레 피여 잇다. 고흔 石炭불 처럼 익을거린다. (…중략…) 나 는 유리 에 각갑한 입김 을 비추어 내 가 제일 조하 하는 일음이나 그시며 가 자. ― 「슬픈기차」177) 일부 이 알몸을 끄집어내라, 때려라, 부릇내라 나는 熱이 오른다, 뺨은 차라리 戀情스레이 유리에 부빈다. 차듸찬 입마침을마신다 176) 『문예시대』 2호, 1927.1. 177) 『조선지광』 67호, 1927.5. - 85 - 쓰라리, 아련히, 그싯는 音響― 머언 꽃, 都會에는 고흔火灾가 오른다. ― 「유리창·2」178) 일부 위의 인용을 살펴보면, 아이뿐만 아니라 화자 자신 혹은 ‘마담 R’이라는 아이가 아닌 다른 대상에게서도 ‘열’을 감지해내는 정지용의 수사가 계속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지용은 ‘붉은 피로 상기된 뺨’을 주로 이런 열로서 감각하며, 그것은 「슬픈기차」에서처럼 일상적 불 이미지인 석탄불 과 연결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오히려 시각적 심상이 아니라, 촉각적 심상을 통해 두드 러진다. ‘붉은 뺨의 열’은 유리판처럼 부서지는 물결(「갑판우」)이나, “靑 만틀 깃”(「슬픈기차」), 유리(「유리창·2」) 등 차가운 물체와의 접촉을 통 해서 더 두드러진다. 정지용 시에서 시각보다 오히려 촉각이 두드러진다는 점은 선행연구에서 잘 지적된 바 있다. 촉각은 대상과의 거리를 더욱 좁히 면서 구체적인 경험과 느낌의 차원으로 그 감각을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유 의미하다. 179) 그 촉각 이전에 ‘접촉’ 혹은 ‘마찰’이란 행위가 선행된다. 정지 용 시에서 유달리 뺨이나 볼, 얼굴 등을 어딘가에 비빈다는 표현이 많이 나 오는 것에는, 바로 이러한 접촉/마찰을 통해 신열을 감각하고자 하는 열망 이 담겨 있다. 뺨을 대리석 테이블에 닿게 하거나(「카페―·프란스」) 유리 창 가까이에 입김을 내뿜고(「유리창」), 돌계단에 볼을 비비며 돌 냄새를 맡는 것(「석취(石臭)」) 모두 이러한 접촉의 양상에 해당한다. 멘케는 ‘미적 인간’으로서의 인간학을 구성하는 기본 개념인 에너지로서의 ‘힘(Kraft)’을 ‘어두운 힘’이라 명명한다. 이 힘은 매우 무법칙적이고 무목적 적이기에, 기계적인 감각화를 통해서는 인식조차 될 수 없기 때문180)이다. 178) 『신생』 27호, 1931. 179) 김신정, 앞의 논문, 15쪽. 180) Menke, Christoph, 앞의 책, 79쪽. 물론 ‘어두운 힘’이란 개념은 멘케가 직접 명명했다기보다, 헤르더의 명명을 빌려와서 새롭게 개념화한 것이다. - 86 - 정지용의 시에서 뺨을 접촉시키는 행위가 다소 슬픈 정서 속에 포섭되어 전 달되는 까닭은 사실 이러한 인식 불가능성에 대한 자각이 담겨 있는 것이 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양하가 언급한 ‘감각의 촉수’를 최대한으로 뻗어서 최소한 에너지의 존재를 인식하고자 하는 열망을 보이는 것이다. 정지용은 뺨에 담긴 열 혹은 불을 가리켜 시종일관 “고흔”이란 수사를 붙이고 있다. 일제 말기에 발표된 「창(窓)」을 분석한 한 연구자는 ‘곱다’라는 수사를 미 학주의적·정신주의적 정결성의 맥락에서 해석한다. 이 시에서 ‘나의 창’은 시적 화자의 내면을 은유하며, “깁과 같이 곻아 지라”라는 주문은 결국 시 인의 내면도 비단처럼 고와지길 바라는 의지의 표명이라는 것이다.181) 요컨대 정지용 초기 시편에서 불 혹은 열기의 내재성을 확인하려는 탐구 과정은, 집/방이라는 내적 공간을 형성하는 데에 이어서 이 열을 ‘신열’로 전이시키는 과정을 거친다. 「샛밝안기관차」 등의 시에서 알 수 있듯 정지 용은 인간 주체의 내적 에너지로서 이 열기를 바라보고 있으며, 이것은 ‘곱 다’라는 수사로 미학적인 것으로 승화되고 있다. 그러나 멘케는 이러한 자 기운동의 ‘내적 원리’로 작동되는 에너지에는 유기체의 생물학적 힘만 존재 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무의식적 힘’과도 관련이 있다고 지적한다.182) 이를 고려하면 정지용이 중기 시편으로 넘어가면서 이 에너지로서의 불 이 미지를 영혼 문제에서 거론하는 것은 상당히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이해된 다. 3.2. 중기 시편에 나타난 영혼과 고고(孤高)의 문제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1931년 가톨릭교 기관지인 「별」에 ‘방지거(方 濟角)’ 183)란 세례명으로 발표한 「셩부활주일」이 첫 종교시편으로 기록된 181) 김정현, 「정지용 후기 시에 나타나는 ‘자연’-이미지의 다층성 연구」, 『한국 현대문학연구』 49권, 현대문학회, 2016, 159~160쪽. 182) Menke, Christoph, 앞의 책, 76~78쪽. 183) 프란치스코(Francesco)를 한자로 음차한 것이다. - 87 - 다. 마침 같은 연도에 발표된 「유리창·2」은 상당히 동요적인 분위기를 지 녔던 초기 시편에서의 전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데,「유리창」의 연작시 편 내지는 후속시편일 것으로 암시되는 제목이면서도 시적 주체의 시선이 아이(즉, “산ㅅ새”)가 아니라 신열을 가진 ‘나’의 몸으로 옮겨왔기 때문이다. 「셩부활주일」의 뒤를 이어 발표된 두 번째 종교 시편인 「무제(無題)」 는 『시문학』 3호(1931.10.)에 다른 (종교 시편이 아닌) 시 3편(「자류(柘 榴)」 「뻣나무열매」, 「바람은부옵는데」)과 함께 수록된다. 이때 『시문 학』 3호 수록작 네 작품에는 모두 ‘불’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은 불 모티프 에 대한 정지용의 천착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준다. 불이 등장하는 구절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나의 령혼안의 고흔불”(「무제」), “장미꽃처럼 곱 게 피여가는 화로에 숫불”(「석류」), “불빛은 송화(松花)ㅅ가루 삐운드시 무리를 둘러쓰고”(「뻣나무열매」), “저달 영원(永遠)의 등화(燈火)”(「바람 은부옵는데」). 다만 단순히 ‘불’이란 시어가 등장했다고 해서 이들이 동등한 의미 범주로 묶일 수는 없다. 「석류」와 「뻣나무열매」는 이미 발표된 작품을 조금 개 작하여 재발표한 것이기에 초기의 ‘아이-불’ 시편과 친연성이 있다. 「바람 은부옵는데」는 정지용 시편 중 달을 불에 비유하는 흔치 않은 작품이고 ‘영원성’에 대한 인식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점이라는 의의가 있지만, 작품 길이가 지나치게 짧고(총 4행) 불도 보조관념에 그치고 있어서 깊이 논의하 기는 어렵다. 불이 가장 적극적인 시적 대상으로 다루어지는 작품은 「무 제」다. 내 무엇이라 이름하리 그를? 나의 령혼안의 고흔불, 공손한 이마에 비츄는 달, 나의 눈 보다도 갑진이, 바다에서 소사올라 나래떠는 금성(金星), 빛하눌에 흰꽃을 달은 고산식물(高山植物), 나의 가지에 머믈지 안코 - 88 - 나의 나라에서도 멀다, 홀로 어엿비 스사로 한그러워― 항상 머언이, 나는 사랑을 모르노라, 오로지 수그릴 . 때업시 가슴에 두손이 여믜여 지며 구비 구비 도라나간 시름의 황혼(黃昏)길우― 나― 바다 이편에 남긴 그의 반 임을 고히 진히고 것노라. ― 「무제(無題)」 전문 마지막 구절에서 “반” 위에 찍힌 강조점은 원문 표기를 반영한 것이다. 이러한 정지용의 강조는 이 작품이 『정지용시집』에 「그의 반」이란 제목 으로 고쳐 수록되면서 한층 명료해진다. 「무제」(「그의 반」)는 연구자들 에게 별다른 이견 없이 정지용의 종교 시편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받아들여 졌는데, 184) 대개 여기서 ‘반(半)’이 종교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중심으 로 해석되어온 반면 “나의 령혼안의 고흔불”은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 다. 이는 종교 시편에 드러난 불 이미지를 그저 “기독교 상징 중 가장 해묵 은 일반화된 상징”185)으로 치부해온 관습과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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