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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를 동요 시편이라 통칭한 정지용 본문

국어국문학, 풍월을 읊다

동시를 동요 시편이라 통칭한 정지용

②℃ 2020. 9. 2. 18:00

시가 쓰인 1927년은 아직 박용철이 정지용과 만나기 전이다. 149) 이숭원, 「정지용 시 「琉璃窓」 읽기의 반성」, 『문학교육학』 Vol.16, 한국문 학교육학회, 2005. 150) 다만 당시에 ‘동시’라는 장르 범주는 ‘동요’와 혼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정지 용을 계속 ‘동시 시인’으로 명명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작품성이 인정된 동 시에 곡조를 붙이면 그것이 곧 동요가 되었던 셈이다. 정지용도 ‘동시’가 아니 라 ‘동요’라는 표제를 쓰고 있기에, 이 글에서는 정지용의 동시를 ‘동요 시편’ 으로 통칭하기로 한다. 후술하겠지만, 동요 발흥 운동과 정지용 사이의 밀접한 관계 역시 그가 자신의 시편들을 ‘동요’로 자각하고 있었음을 방증해주기 때문 이다. 151) 최현식, 「‘어린 아이’의 전통과 근대―정지용과 동시(童詩)」, 『민족문화연구』 81권,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8, 483쪽. 152) 이소연, 「‘아이’를 통해 본 정지용 시의 근대 인식 양상」,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63권, 한국문학이론과 비평학회, 2014, 99쪽. - 74 - 우리 옵바 가신 고슨 해ㅅ님 지는 서해 건너 멀니 멀니 가섯 다네. 웬일 인가 저 하눌 이 피ㅅ빗 보담 무섭 구나. 날니 낫나. 불이 낫나. ― 「서쪽한울」153) 전문 정지용의 동요 시편 가운데에는 아이 화자가 남매 지간의 별리(別離) 상 황을 노래한 것이 많다. 「서쪽한울」과 같은 지면에 수록된 「감나무」도 돌아오지 않는 “우리 옵바”를 노래하며, 「한울혼자보고」의 화자는 시집 간 누나를 그리워한다. 이후 「산소」(『신소년』 5권 3호, 1927.3.)에서는 누이의 죽음(“어린 누의 산소를 뭇 고 왓 소.”)이 암시되며, 「옵바가시고」 (『문예월간』 3호, 1932.1.)에는 다시 오빠의 부재 상황이 드러난다. 사실 반복되는 남매의 별리 모티프는 정지용만의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특 히 ‘오빠의 부재’의 경우, 지금까지도 널리 불리는 동요인 「오빠생각」의 가사가 연상되지 않을 수 없다.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우리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 동요 「오빠생각」 1절 이 유명한 동요는 『어린이』(1925년 11월호) 문예 응모에 당선된 최순 애(崔順愛, 1914~1998, 당선 당시 12세)의 동시에 작곡가 박태준(朴泰俊, 1900~1986)이 음률을 붙여 만들어졌다.154) 「오빠생각」이 당선된 이듬해 153) 『학조』 1호, 1926.6. 정지용, 『정지용 전집 1:시』, 최동호 편, 서정시학, 2015. (이하 정지용의 모 든 시는 여기에서 인용) 154) 박태준은 1928년 9월 14일에 열린 박태준 창작음악회에서도 「오빠생각」을 피아노로 연주한 바 있다. 박태준이 스스로 이 동요를 자신의 대표곡이라 여겼 - 75 - 이자 등단 연도인 1926년부터 정지용은 『어린이』에 동요풍 시편을 발표 하기 시작했다. 그 전부터 『어린이』의 독자였을 것이고, 따라서 「오빠생 각」의 존재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155) 「오빠생각」은 작자가 실제로 ‘어린이’였다는 점에서 동요 창작의 전범이 될 만했다. 그런 어린이 의 시각으로 ‘서울로 떠난’ 오빠를 그리는 상황에는 당시 경제적 궁핍으로 젊은이들이 상경을 요구받았던 현실이 잘 반영되어 있기도 하다. 「서쪽한 울」의 “서해 건너” 역시 이런 맥락에서 조선 땅을 떠나 이국으로 향해야하 는 오빠의 상황이 암시된다. 즉 정지용은 「오빠생각」의 어조와 모티프, 주제를 적극적으로 차용하여 자신의 문학적 출발점에 끼워 넣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요 「오빠생각」을 작곡한 박태준, 그리고 그와 가까웠던 동시 작가 윤 복진(尹福鎭, 1907~1991)에게서도 정지용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박태 준의 작곡집 가운데 『중중 때때중』, 『양양 범버궁』, 『물새 발자옥』 이상 세 권은 모두 계성학교 후배 관계였던 윤복진이 쓴 가사로 구성되어 있다.156) 이 중 『중중 때때중』(1929)은 실물이 발견되지 않아 16편의 수 록곡 목록을 알 수 없지만, 널리 알려진 동요 「중중 때때중」(박태준 작곡, 윤복진 작사)은 제목과 동명인 표제작으로서 수록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중중 때때중 바랑 메고 어디 갔나 중중 때때중 목탁 치고 어디 갔나 ― 동요 「중중 때때중」 1절 던 것 같다. 손태룡, 「박태준의 작곡집 고찰」, 『음악문헌학』 3호, 한국음악문헌학회, 2012, 39~40쪽 참조. 155) 후술되겠지만, 당시 아동문학 운동의 주도자들과 정지용 사이의 관련도가 옅지 않음을 감안하면 「오빠생각」을 의식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오히려 현저히 적다. 156) 손태룡, 「윤복진의 가사로 된 악곡 고찰」, 『음악문헌학』 5호, 한국음악문헌 학회, 2014, 10쪽. - 76 - ‘중중 때때중’은 일명 ‘빡빡머리’를 깎고 나온 동무를 여럿이 짖궂게 놀려 주는 말이다.157) 순수하고 장난스러운 아이들의 모습이 엿보인다. 그런데 정겨운 느낌을 주는 후렴구인 ‘중중 때때중’은 사실 윤복진의 가사보다 정 지용의 동요 시편에서, 그것도 여러 번에 걸쳐 먼저 발견된다. 가장 잘 알 려진 작품은 「삼월삼질날」이다. 중.중. 때때 중. 우리 애기 까까머리. 질라라비 훨 훨. 제비색기 훨 훨. ― 「삼월삼질날」158) 일부 「삼월삼질날」은 1928년 『조선동요선집』에 발표되었고, 이후 7년 뒤 『정지용시집』에도 별다른 개작 없이 실린다. 그러나 이 시는 본래 1926년 「카페―·프란스」와 함께 게재된 동요 시편 중 하나인 「딸레(人形)와아주 머니」에 뿌리를 두고 있다. 「딸레(人形)와아주머니」는 특이하게도 ‘딸레’ 와 ‘작은 아주머니’에 관한 이야기인 전반부는 「딸레(人形)」(『어린이』 11권 6호, 1933.6.)159)로, 후렴 ‘중중 때때중’을 비롯한 후반부는 「삼월삼 질날」로 분리되어서 개작을 거치는데, 특히 마지막 네 줄 “호. 호. 잠들여 노코/냥. 냥. 잘도먹엇다./중. 중. 때때중./우리 애기 상제 로 사갑소.”는 거 의 그대로 반복된다. 「삼월삼질날」은 “一九二四年作”이라 명시되어 있다. 160) 『중중 때때 157) 원종찬, 「동요시인 윤복진의 작품세계」, 『아동문학과 비평정신: 원종찬 평론 집』, 창작과비평사, 2001, 300쪽. 158) 『조선동요선집』, 1928. 159) 이후 『정지용시집』에는 「딸레」로 소소한 개작을 거쳐 수록된다. 160) 그러나 위에서 서술했듯 「삼월삼질날」은 그것 자체로 처음 출현한 작품이 아니라 ‘개작’된 작품이기 때문에, 정지용이 어떤 텍스트를 가리켜 ‘1924년작’ 이라 했는지 정확하지 않다. 개작 전후를 구분하지 않고 원작에 해당하는 「딸 - 77 - 중』이 출간된 1929년보다 훨씬 이전이다. 「중중 때때중」의 창작 시기는 정확히 알기 어려우나, 발표 시기이든 창작 시기이든 ‘중중 때때중’이란 후 렴을 동요적 문법에서 먼저 활용한 쪽은 오히려 정지용으로 보인다.161) 다 만 ‘중중 때때중’이 아이들끼리 희롱하는 말을 가리킨다면 정지용과 윤복진 모두 민간에서 전승되던 노래 혹은 유희를 참고했을 수 있다. 162) 둘 사이에 엄격한 선후관계가 따른다기보다는 당시 동요 창작의 흐름에서 ‘중중 때때 중’은 중요한 모티프로서 공유되었다고 보는 편이 온당하다. 「오빠생각」과 「중중 때때중」은 발표 당시부터 주목받는 동요였다. 앞 서 살펴봤듯 정지용의 동요 시편들은 이러한 동요들과 상호연관을 가지는 데, 이는 남매 별리 모티프와 후렴 ‘중중 때때중’이라는 동요의 양식적 특성 을 공유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즉 정지용은 당대 동요 발흥 운동의 주된 과 제였던 동요 장르의 정착 작업에 적극적으로 착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모티 프의 공유라는 내용적 측면뿐만 아니라, 대개 대립적·병렬적 구성을 취함으 로써 동요의 큰 특징 중 하나인 단순화된 형식 역시 표방하고 있기 때문이 다.163) 나아가 1927년에는 ‘조선동요연구협회’의 창립 회원이 됨으로써164) 레(人形)와아주머니」를 1924년작이라 했을 수도 있지만, 「삼월삼질날」이 1924 년작이고 「딸레(人形)와아주머니」가 역으로 그 개작 작품일 가능성도 있기 때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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