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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밝안기관차와 시편 파충류동물 그리고 슬픈기차 본문

국어국문학, 풍월을 읊다

샛밝안기관차와 시편 파충류동물 그리고 슬픈기차

②℃ 2020. 9. 2. 20:00

이의 ‘발열’하는 몸에서 추출해낸 것 같다. 느리잇 느리잇 한눈파는 겨를 에 사랑이 수히 알어질가 도 십구나. 어린아이 야. 달녀가자. 두뺨 에 피어오른 어엽븐 불이 일즉 꺼저버리면 엇지 하자니? 줄 다름질 처 달녀가자. (…중략…) 어린아이 야, 아무것도 몰으는 샛밝안 기관차 처럼 달녀가자. (강조: 인용자) ― 「샛밝안기관차(機關車)」170) 「샛밝안기관차」에서는 “어린아이”와 “샛밝안 기관차”가 동일시되고 있 는데, 왜냐하면 이들은 “두뺨 에 피어오른 어엽븐 불”이 꺼져버릴까봐 “줄 다름질 처 달녀가”야 하는 숙명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서로 멀지 않은 시기 에 발표된 세 시편 「파충류동물」(1926.6.)과 「샛밝안기관차」(1927.2.) 그리고 「슬픈기차」(1927.5.)는 ‘기차’라는 같은 소재를 다루면서도171) 각 각 뚜렷한 개성을 보여주고 있어서, 당시 기차에 대한 정지용의 시각은 굉 장히 다각적이었음을 짐작하게끔 한다. 그 중에서도 「샛밝안기관차」는 기 차에게서 ‘불’의 속성을 이끌어내고 있다. 당대에 조선과 일본에서 가장 상 용되고 있었을 증기기관차의 증기기관은, 석탄을 태워서 증기로 추진력을 만들어내는 열기관이다. 정지용은 ‘근대적 산물’이란 기호로 기차를 바라보 기 이전에 먼저 ‘불의 힘으로 나아가는 사물’로서 기차를 바라보았을 것이 다. 그래서 「황마차」에서 “내 조고만 혼”을 놀라게 했던 “전차(電車)”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전차’에는 불의 속성이 결여되 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시로 돌아오자면, 「샛밝안기관차」에서 정지용은 170) 『조선지광』 64호, 1927.2. 171) 그밖에 『동방평론(東方評論)』 4호(1932.7.)에 발표된 「기차」도 있으나, 시기 적인 차이가 다소 존재해서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 82 - ‘아이-불-기관차’의 연결고리를 마련한다. 이 시는 1925년 1월에 창작172) 되었기에, 사실상 아이 모티프와 불 모티프가 결합하는 최초의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아이 혹은 기관차의 “두뺨”에 피어오른 ‘석탄’ 불은 「홍역」에서의 “석탄” 불과는 구분된다. 후자는 방 안이란 일상적 공간에 온화한 온기를 채워넣어주는 반면, 전자는 아이/기관차를 움직이는 원초적 인 동력(動力)에 가깝다. 따라서 정지용은 아이의 몸 속에서 일렁이는 어떤 에너지(energy)로서의 불씨를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샛밝안기관차」의 주 제가 ‘아이의 에너지를 발견’하는 것이라면, 이 시의 아이가 “일종의 열정적 인 환상과 추구에 대한 의지를 가진 존재”173)라거나 “역동적·진취적 기상과 함께 순수성”174)을 상징한다는 분석은 일견 타당한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분석들은 시에 알게 모르게 스며든 슬픈 정조를 제대로 설 명해주지 못한다. 앞서 서술했듯 「샛밝안기관차」의 아이와 기관차는 ‘숙명 성’을 공유한다. 느릿느릿 움직이면 ‘사랑이 쉽게 알아지고’ ‘불이 일찍 꺼버 릴까봐’ 아이는 달음질을 쳐야한다. 즉 여기서 화자가 두려워하는 두 가지 상황, 사랑이 가볍게 취급되는 것과 불이 꺼지는 것이 밀접하게 관련이 있 음을 알 수 있다. 아이 안의 불씨가 곧 에너지라는 이 글의 견해를 상기한 다면, 불이 꺼지는 것은 에너지가 소진된다는 것이고 ‘죽음’과도 같이 존재 근거가 사라진다는 의미이다. 사랑을 쉽게 알면 안 된다는 화자의 강박은 그만큼 정지용에게 ‘사랑’이 중요하며 삶을 유지하는 문제와 직결됨을 방증 한다. 실제로 정지용은 여러 글들에서 사랑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을 은연중 에 드러낸다.175) 다만 사랑과 에너지, 불씨라는 근본 요소를 한꺼번에 품은 172) 발표 지면에 “一九二五·一月·京都”란 표기를 동반하고 있다. 173) 김정현, 앞의 논문, 257쪽. 174) 이소연, 앞의 논문, 85쪽. 175) 예컨대 시 「다시 해협(海峽)」(『조선문단(朝鮮文壇)』 24호, 1935.8.)의 유명한 마지막 구절 “스물 한살 적 첫항로(航路)에/연애보다도 담배를 먼저 배웠다.” 는 ‘연애’를 그만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샛밝안기관차」 에서 드러난 강박처럼 ‘사랑을 쉽게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해볼 수 있다. 이 시에서 추억하고 있는 “스물 한살 적”(1923년, 교토 도시샤대학으 로 처음 유학길에 올랐던 때)과 「샛밝안기관차」의 창작 연도 1925년은 서로 그리 먼 시기가 아니다. 사랑의 중요성을 보다 직접적으로 역설하는 서술들도 있다. 시 「비들기」(『조선지광』 64호, 1927.2.)의 화자는 “하마 자칫 이즐 뻔 - 83 - ‘아이’라는 존재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달려야만 하는 존재론적 숙명에 처 해있다. 불로 인해 달려갈 수 있게 되었으면서도 또 계속 달려야만 그 불을 꺼트리지 않는다는 상황은 하나의 슬픈 역설이다. 그러므로 「샛밝안기관 차」에는 아이의 에너지를 발견하는 역동성과, 그 에너지의 유지 조건을 숙 명화하는 슬픈 역설성이 혼재한다. 정지용은 이때부터 이미 열병 걸린 아이의 모티프를 염두에 두었을 가능 성이 높지만, 이후 「발열」과 「홍역」 등의 시편에서는 아이가 지닌 ‘기 관차’로서의 잠재력을 의도적으로 은폐한다. 대신 역동적인 에너지원으로서 의 ‘석탄’이 아니라 그러한 에너지를 소진해버린 존재를 묵묵히 지켜주는 ‘석탄’ 불을 아이 옆에 나란히 놓는다. 아픈 아이를 바라보는 정지용의 시선 이 끝없는 애상성으로 침잠하지 않고 오히려 ‘아름다움’을 감각하는 까닭은, 아이와 불이 결합함으로써 정지용 자신에게도 “따 뜻 한 화로 가”를 돌려주 는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다. 「황마차」의 화자가 종달새에게 느꼈던 “씨 다 듬어 주고 시픈, 씨다듬을 밧고 시픈 마음”은 비로소 만족을 얻는다. 초 기 시편에서 구축된 정지용의 시적 공간은 아픈 아이와 ‘숯불’ 계열의 불,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어른 화자(정지용의 분신이라 할 만한.)가 삼각형을 이루는 따뜻한 ‘방 안’이라 할 수 있는데, 이 공간에서 일방적인 ‘보호자― 피보호자’의 상하구도는 무화(無化)된다. 돌봄과 돌보아짐, 데움과 데워짐, 아픔과 고침은 서로 구분없이 뒤섞인다. 살펴본 것처럼 아이를 화자로 내세운 정지용의 동요 시편은 선구적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표면적이다. 이는 동요 시편 창작을 ‘아이다움’에 대한 근대 햇던/사랑. 사랑이,” 비둘기를 타고 오는 장면을 목격한다. 여기서는 사랑을 망각하게 되는 것을 경계한다. 「샛밝안기관차」에서 사랑을 쉽게 알지 않으려 하는 것도, 결국에는 사랑을 쉽게 잊어버리지 않기 위함일 수 있다. 종교 시편 에서의 ‘사랑’은 신앙적인 의미가 덧대어지면서 오히려 그 중요성은 중대해진 다. 「다른한울」(『가톨릭청년』 9호, 1934.2.)의 “령혼은 불과 사랑으로!”나 「또 하나다른태양」(동일 지면)의 “사랑을 위하얀 입맛도 일는다” 등의 구절에서 ‘사랑’은 화자에게 다른 삶의 형식, 말하자면 현세(現世)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 생명을 부여해준다는 의미까지도 지닌다. 산문 「시의 옹호」(『문장(文章)』 5호, 1939.6.)는 시인이 갖추어야할 ‘정신적’인 요소로 “애(愛)”를 가장 많이 강조하 는데, 이 글은 “애(愛)”를 신앙적인 의미로 설명하면서도 보편적인 시학 원리 로 조정해나간다는 점에서 혼재성을 보인다. - 84 - 적 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데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여러 이미지와 수 사, 구성 등이 출몰하며 시작(詩作) 활로를 모색하던 초기 작업의 일환으로 보는 관점에 힘을 실어준다. 정지용의 아이는 담론의 촉수로부터 빠져나온 다. 아이에게 ‘순수함’이 있다면, 그것은 아이 존재 안에 담긴 에너지의 원 초성이자 역동성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정지용의 동요 시편은 어느 구석에 늘 균열을 품고 있었다. 아이는 이 균열을 뚫고 나와 ‘불’ 모티프와 결합하 는 독특한 미적 형식을 보여준다. 다만 신체 안에 내재하는 ‘내열(內熱)’ 혹은 ‘내화(內火)’로서의 신열은 비 단 아이의 몸에서만 발견되었던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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