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ikastos
김소월의 시혼과 정지용의 종교적 상징성 본문
그러나 「무제」의 “나의 령혼안의 고흔불”은 상징에 기댄 기호라기보다 는, 정지용이 초기 시편부터 붙잡고 있었던 ‘내재(內在)하는 불’ 기호의 종 교적 연장으로 보아야 한다. 3.1.에서 상세시 서술했듯 정지용의 시적 주체 가 아이 몸 안에 깃든 일종의 ‘에너지’로서 석탄불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그 전에 먼저 자신의 몸 안에 항존하고 있는 불과 열기를 발견하는 작업이 선 행되어야 했었다. 종교 시편에서는 불을 발견하는 시선이 다시 자신에게로 향한다. 이는 앞서 말한 「유리창」과 「유리창·2」 사이에 보이는 시선의 184) 전술했듯 정지용 종교 시편이 지나치게 직설적이거나 가톨릭 요소의 이질성 이 해결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적되는 점을 고려하면, 「무제」는 가톨릭교를 연상시키는 시어를 직접 노출하지 않으면서도 종교 시편으로서의 인상을 갖추 고 있으므로 이른바 ‘모범’으로서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관점은 특 정 시편들을 ‘장르’에 귀속시킨 후 성패를 가름한다는 도식성이 문제가 된다. 185) 유성호, 「정지용의 이른바 ‘종교시편’의 의미」, 『정지용의 문학 세계 연구』, 163쪽. - 89 - 이행과도 상통한다. 불과 열기는 다시 시적 주체의 안에 깃든 것으로 나타 난다. 이러한 불의 내재성은 종교 시편을 비롯한 1930년대 시편들 한가운데 서 견고함을 잃지 않고 지속된다.186) 다만 「무제」에서 보이는 시적 주체 의 ‘안’이라 함은 「유리창·2」과는 의미가 사뭇 달라지는데, 그것은 ‘몸’이 아니라 “령혼”의 안이기 때문이다. “령혼”은 종교적인 상징성을 띤 상투적 어휘로 보이지만 사실 정지용에게 ‘혼(魂)’이란 낯선 거리에서 방랑하는 시 적 주체를 표현하기 위해 종종 동원되던 시어였다. 187) 정지용의 작고 외로운 ‘혼’은 “전차(電車) 가 이이익 돌아 나가는 소리에” 놀라 파닥거리거 나,(「황마차」) “비날니는 이국(異國)거리를/탄식(嘆息)하며 헤메”던 조약돌 같은 “혼(魂)의조각”이다(「조약돌」(『동방평론』 4호, 1932)). 이 “혼”은 “령혼”으로 표기가 바뀌면서, 퇴폐적인 주체를 암시하는 것으로 비칠 여지 를 걷어내고 성스럽고 신비로운 ‘불’이 자리잡는 주체 내(內) 공간으로 격상 된다. 신성화된 정지용의 “령혼”은 오히려 김소월의 ‘시혼(詩魂)’과 가까워진다. 김소월은 시혼을 “가장 놉피 늣길 수도 잇고 가장 놉피 깨달을 수도 잇는 힘”으로 표상한다. 시혼이 지닌 이러한 ‘높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다. 「시혼」에서 김소월은 ‘시혼’을 체험하는 경로를 “죽음의 새벽”이나 “그림자”로 설명하기 때문에, 일견 퇴폐적인 신비주의 시론이라는 인상을 186) 가령 「별」(『가톨릭청년』 4호, 1933)에는 “령혼 안의 외로운 불”이라는, 「무 제」와 거의 동일한 표현이 있다. 여기서는 종교 시편으로 취급하진 않지만, 「불사조」(『가톨릭청년』 9호, 1934) 역시 “가장 안”에 살아가는 불새[火鳥]로서 의 불사조(즉 “비애”)의 존재를 탐색한다. 187) 신범순은 정지용의 ‘혼’을 ‘기억’이 발생하는 공간으로 해석하며 ‘감각’이 발 생하는 ‘육체’와 대비하여 후기 시편과 기행산문의 의미를 논구한다. 이때 예 시로 거론되는 시가 김소월의 「초혼(招魂)」인데, 김소월은 “떠도는 혼을 불러 들임으로써 혼과 백이 조화되고 통일됨으로써 육체와 정신의 질병을 치유”하 는 주제를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초기 정지용의 ‘혼’이 외롭고 유약한 주체의 모습을 보여주는 맥락은 「초혼」에서의 ‘혼’에 대한 사유와 비슷해 보인다. 다 만 정지용은 이내 ‘망각’과 ‘기다림’의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김소월식의 격정적 인 ‘혼의 끌어들임’으로부터 멀어진다고 신범순은 지적한다. 여기에서 ‘망각’과 ‘기다림’은 본고의 2장에서 논의한 릴케적 ‘체험’과 관련이 깊다. 신범순, 「정지용의 시와 기행산문에 대한 연구―혈통의 나무와 德 혹은 존재 의 平靜을 향한 여행」, 196~197쪽. - 90 - 준다. 여기까지만 보면 ‘시혼’이란 거리에 떠도는 죽은 자들의 망령과도 같 은 음침한 영적 기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든다. 그러나 “가장 놉피 늣길 수도 잇고 가장 놉피 깨달을 수도 잇는 힘”이란 표현은 시혼을 실체 없는 영적 기운이 아닌 분명히 감각되는 ‘힘’으로 일컫고 있으며, 그것 의 존재를 인식하는 모종의 경지를 “놉피”라는 존재론적 높이에 결부시킨 다. ‘혼’은 이러한 ‘높이’를 지님으로써 주체로 하여금 끊임없이 추구하고 상 양하게끔 한다. 그리고 낮은 곳에 있는 주체에게 현현(顯現)되어야할 신성 한 개념으로 거듭나며, 이 높은 혼을 ‘내면화’한 주체는 스스로 한층 고양된 존재가 된다. 정지용은 이러한 종교적인 ‘현현’의 원리를 시론에 적용한다. “시는 언어와 Incarnation적 일치”란 문구가 대표적이다. ‘육화(肉化)’로 번 역되는 ‘incartnation’은 예수의 몸으로 현현된 하나님의 성령을 의미하는 기독교 용어다. 육화를 내세우는 정지용의 시론과 『정지용시집』의 표지화 「수태고지」 사이의 관계는 선행연구에서 면밀히 분석된 바 있다. 신비를 현현한다는 것은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는 작업과 연관되어 있으며, 이 는 곧 언어로 이미지를 창출해내는 정지용 모더니즘이 지닌 특성을 드러낸 다는 결론이었다. 「시혼」에도 ‘현현’에 대한 사유가 등장하기에, 다시 인 용해둔다. 그러한 우리의 영혼(靈魂)이 우리의 가장 이상적(理想的) 미(美)의 옷을 닙 고, 완전한 운율(韻律)의 발거름으로 미묘한 절조(節操)의 풍경 만흔 길 우흘, 정조(情調)의 불 붓는 산(山)마루로 향하야, 혹은 말의 아름답은 샘물에 심상 (心想)의 적은 배를 젓기도 하며, 잇기도든 관습의 기구(崎嶇)한 돌무덕이 새 로 추억의 수레를 몰기도 하야, 혹은 동구양류(洞口楊柳)에 춘광(春光)은 아릿 답고 십이곡방(十二曲坊)에 풍류(風流)는 번화(繁華)하면 풍표만점(風飄萬點) 이 산란(散亂)한 벽도화(碧桃花)꼿닙만 저흣는 움물 속에 즉흥(卽興)의 드레박 을 드놋키도 할 때에는, 이곳, 니르는 바 시혼(詩魂)으로 그 순간에 우리에게 현현(顯現)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의 시혼(詩魂)은 물론 경우에 따라 대소심천(大小深淺)을 자재변 환(自在變換)하는 것도 안인 동시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존재입니다. ― 김소월, 「시혼(詩魂)」188) 일부 - 91 - 정지용이 「시와 언어」에서 강조했던 “Incarnation적 일치”는 단지 시와 언어의 단독 대면을 가리키지 않는다. 시와 언어 사이에는 ‘정신(情神)/정령 (精靈)’이란 매개자가 존재해야만 한다. “Incarnation적 일치” 다음에 등장 하는 문장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시의 정신적 심도는 필연으 로 언어의 정령을 잡지 않고서는 표현의 제작(製作)에 오를 수 없다.” 따라 서 여기에는 시-언어-정령이란 삼위일체의 구도가 있으며, 시와 언어를 아 우르는 근본적인 바탕 개념은 오히려 ‘정령’, 즉 ‘영혼’인 것이다. 요컨대 정지용은 종교 시편을 통해, 그리고 “Incarnation적 일치”라는 시 론에서의 언급을 통해 현현되는 ‘영혼’의 숭고한 높이를 사유하게 된다. 「무제」에서도 “령혼안의 고흔불”를 은유하는 “달”, “금성”, “고산식물” 등 의 시어들은 모두 높이를 지닌 사물들이었다. 초기 시편에서의 방랑하는 ‘혼’은 그 방랑을 극복하기 위해 내향(內向) 의지를 갖게 되고, 그 과정에서 아이-불과 ‘나’ 사이에 긴장관계가 산출되는 ‘방 안’이라는 내면공간이 구축 된다. “Incarnation”의 맥락을 투입할 때, ‘아이’ 존재를 숯불이 타오르는 방 안으로 포용하는 초기 주체의 모습은 ‘상징적 잉태’로 의미화해볼 수 있다. ‘육화’는 비가시적인 것의 가시화뿐만 아니라 ‘불가능의 가능’이란 의미도 지닌다. 육화 양상의 가장 대표격인 수태고지를 통한 마리아의 잉태가 신성 성을 띠는 까닭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불가능했던 잉태가 ‘가능’해졌기 때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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