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ikastos
흰 그림자와 고뇌하는 동주의 자아 본문
적국이라는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동주의 자아는 고뇌하고 있다.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깨달은 다음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를 40) 가스똥 바슐라르, 이가림 역,『촛불의 미학』(문예출판사, 1975), 80쪽. 41) 이재선, 「집의 공간시학」,『한국 문학 주제론』(서강대학교출판부, 1989), 328쪽. - 25 - 하나, 둘, 제 고장으로 돌려보내면 거리 모퉁이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 그림자들 연연히 사랑하던 흰 그림자들, 내 모든 것을 돌려보낸 뒤 허전히 뒷골목을 돌아 황혼처럼 물드는 내 방으로 돌아 오면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 하루 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 -「흰 그림자」부분 윤동주는 자아 완성을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은 시인 중의 한 사람이다. 자신을 괴롭히면서 수행하는 수행자처럼 노력 한다.「흰 그림자」는 일본으로 유학 가서 처음으로 쓴 시다. 연전 졸업 후의 진로를 두고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의무, 한 인간으로서의 이상, 또 지조... 이런 여러 갈래로 처절하게 서로 부딪치고 있던 갈등이, 이젠 대학 졸업 후의 문제로 일단 유예되었다. 그간 날카롭게 날이 서 있던 정신의 긴장이 스르르 이완되 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를 하나, 둘, 제 고장으로 돌려 보내면’ ‘거리모퉁이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를 감 지한다. 42) 「흰 그림자」는 윤동주의 자신에 대한 예민한 촉수를 느낄 수 있는 시이다. 고뇌하는 한 젊은이의 의식을 보면서 낮의 갈등에서 돌아와 방에서야 안식을 취하는 시인의 정서를 알 수 있다. 여기 에서 “흰 그림자”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시인 자신의 고뇌의 덩어리가 은유로 나타나고 있다. 어둠이 몰려오는 시간, 하 42) 송우혜, 앞의 책, 267쪽. - 26 - 루의 번민과 괴로움을 하나, 둘 돌려보내고, 온전한 나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은 시인의 자아가 담겨있다. 윤동주에게 있어 영혼의 의식은 두 세계로 분열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방으로 돌아와서야 자신만의 절대적인 사색을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자신만의 세계에 천착하는 동주의 자아에서 알 수 있다.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 / 하루 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 자”는 자신의 방에서만이 자신을 이완시키는 시인의 의식 세계의 표현이다. 방황하던 자신을 바로 세우고 “의젓한 양처럼” 다시 일 어서는 자아가 숨 쉬고 있다.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이제 내 좁은 방에 돌아와 불을 끄옵니다. 불을 켜두는 것은 너무나 피로롭은 일이옵니다. 그것은 낮의 연장이옵기에이제 창을 열어 공기를 바꾸어드려야 할 텐데 밖을 가만히 내다보아야 방안과 같 이 어두워 꼭 세상 같은데 비를 맞고 오던 길이 그대로 빗속에 젖어 있사옵니다. 하루의 울분을 씻을 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사상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가옵니다. - 「돌아와 보는 밤」전문 윤동주의「돌아와 보는 밤」은 일상인들이 느끼는 세상에 대한 피로를 느끼며 집으로 돌아와서 느끼는 사유를 표현한다. 그러므 로 자기 방에 와서 느끼는 일상의 감정을 성찰하는 시간으로 만들 고 있다. 그가 불을 켜지 않은 이유는 아직도 낮의 경계에서 풀려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파악할 수 있는 연은 “비를 맞고 오 던 길이 그대로 빗속에 젖어 있사옵니다”로 아직도 일상에서 벗어 나지 못하는 상태를 나타낸다. 그의 삶의 무게가 무겁게 와 닿은 시로써 갈등하면서 힘겨워 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이 시에서 3연이 없다면 시의 완결성이 떨어질 것이다. - 27 - 1-2연은 현실의 고통과 힘겨움을 표현하고 있다면 3연은 그 고통 을 통하여 스스로 성찰을 얻기 때문에 이 시의 가치가 있다. 이때 방은 “사상이 능금처럼” 익어가는 깨달음의 장소로 변모한다. 육체 적인 눈을 감음으로써, 내면세계가 익어가는 역설, 이것이 바로 시 인이 식민지 시대라는 어두운 현실을 꿋꿋하게 감내하게 한 존재 방식이다43) 여기에서 방의 공간화의 의미가 확장되고 있다. 방은 하루의 생각을 정리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공간이며, 자아를 성숙 시키는 공간인 것이다.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둠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 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43) 정순진, 「이육사와 윤동주의 시에 나타난 시간인식」, 『어문연구』,6호(1985. 5), 266쪽. - 28 - -「또 다른 고향」전문 윤동주는 고향과 타향을 항상 반복적으로 이동하면서 사라져버 린 지금의 고향을 보고 갈등하고 있다. 타향에서 돌아왔으나 결코 평화로운 공간이 아니다. 그러므로 백골이 따라와서 한방에서 공 존하게 된다. 여기에서 백골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의 자아가 갈등하는 모습일 것이다. 이미 그에게는 고향의 공 간이 상실로 다가오고 있다. 고향집 방에 누웠으나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어둠을 짖는 개는 / 나를 쫓는 것일 게다”처럼 안주하지 못하고 이상을 찾아 고향을 떠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어둠은 일제 강점기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는 다른 세계로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윤동주는 고향 집 방에서 백골과 대치하고 있다. 그의 의식은 현 실의 불안과 갈등을 동반한다. 방에서의 사색은 타향에서도 계속 되어 왔다. 그러면 집에서의 방이라는 공간과 타향에서의 방이라 는 공간은 어떻게 다를 수 있을까. 고향집에서의 자아는 끊임없이 이상을 쫒고 있다. 그러나 타향 방에서의 동주의 사색은「쉽게 쓰 여진 시」에서 보면 “육첩방은 남의 나라” 로 결코 그곳에서도 안 주하지 못하고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러므로 동주의 고뇌는 어디에도 결코 정착하지 못하는 자아가 드러난다. 일제 강점기 의 불안의식의 극대화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그는 부초같이 어디 에서도 뿌리를 내릴 수 없는 떠도는 영혼의 소유자였다. 방의 공간화의 표현은 독특한 그의 성격과 가치관에서 나타나고 있다. 고립된 자아는 성찰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고독한 청 년은 문학에 대한 열정과 현실에 대한 진지한 노력으로 그만의 세 계를 만들어 내고 있다. 성찰하는 공간으로서의 방은 윤동주에게 상상력의 세계이며, 우 - 29 - 주의 중심을 이루고 자아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공간으로 발견된 다. 4. 동심의 원용 윤동주는 1935년 12월부터 1937년까지 35편의 동시를 창작하였 다. 관념적이고 어려운 시를 쓰던 윤동주가 갑자기 동시를 쓴 계 기에 대해서 김열규는 인간의 생에 있어 가장 보호받았던 존재이 전 유아기에의 퇴행은 그만큼 현실 생활의 파탄을 의미하게 된다 고 보아44) 윤동주가 동시를 쓴 것은 유아적 퇴행으로 보았다. 그 러나 이런 주장을 본고는 다른 시각으로 본다. 윤동주가 동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정지용 시집이 나오면서다. 그래서 1936년 간도연길에서 발행하던 『카톨릭 소년』지에 「병아리」(11월), 「빗자루」(12월)를 발표하였다. 윤동주 문학에서 동시는 작품 전 개 과정에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음에도 대다수의 논자들이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하고 경시하며 이것을 퇴행으로 보려는 주 장45) 을 한다. 윤동주 동시의 가치는 쉬운 언어와 구체적이고 진 솔하게 감정을 엮어나가는 것으로 기존의 시풍과는 확연이 다름을 알 수 있다. 또한 여러 가지 사물을 통해 동시의 이미지를 표현했 다. 바람 부는 새벽에 장터 가시는 우리 아빠 뒷자취 보고 싶어서 침을 발라 뚫어논 작은 창구멍 아롱아롱 아침 해 비칩니다. 44) 김열규, 「윤동주론」,『국어국문학』27호(1964), 45쪽.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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