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ikastos
화산활동으로 생겨난 화구호 백록담, 훈훈한 열기 환기하며 시상 전개 본문
약간의 비약을 감수하자면, 백록담이 화산활동으로 생겨난 화구호(火口 湖)라는 사실도 고려해볼 만하다. 그렇다면 백록담은 원래 ‘더운 물’이었을 것이다. 「온정」의 ‘온정’이 태곳적부터 늘(‘하냥’) 더운 물인 반면 백록담 은 태곳적 한때에 더웠던 물이다. 즉 「백록담」은 흐드러진 붉은 불씨들과 도 같은 뻑국채 꽃을 백록담에 결합시키면서 태곳적의 훈훈한 열기를 다시 금 환기하면서 시상을 전개시킨다. 초기 시편에서 살펴보았듯 정지용에게 꽃, 특히 붉은 꽃은 ‘불’의 원관념이기도 하고 보조관념이기도 하며 동일시 ‘한라수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수국은 토질에 따라 푸른색, 붉은색, 녹 색, 흰색 등 다양한 빛깔을 띠는 꽃으로 알려져 있다. ‘도체비’는 도깨비의 제 주 방언인데, 수국이 도깨비처럼 신묘하게 색깔을 바꾼다 하여 제주도에서는 ‘도체비꽃’이라 불린다는 정보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도체비꽃”이 수국이라면 ‘파랗게 질린다’는 표현에도 정확히 들어맞는다. 원래 파란색이 아 니었던 수국꽃이 파랗게 변해과는 과정을, 정지용은 ‘파랗게 질린다’는 상상력 풍부한 표현으로 대신했던 것이다. 최동호, 『정지용 사전』, 86쪽. 오탁번, 「지용시의 심상의 의미와 특성」, 『한국현대시사의 대위적 구조』, 고 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원, 1983.(김은자, 『정지용』, 새미, 1996, 226쪽에서 재 인용) - 112 - 되었다. 이후 백록담은 푸른빛의 심상과 ‘쓸쓸한’ 정서를 나타내는 표현들을 통해, 이제는 식어버렸지만 세계의 ‘거울’이자 ‘그릇’이 된 현재의 물을 보여 준다. 1연과 그 이후 연들 사이에 보이는 분위기의 낙차는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정지용은 식어버린 화산(휴화산)을 등정하면서 이 태곳적의 열기가 남긴 흔적을 가늠해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더운 물이 환상적인 내면 풍경으로만 재구성되어 있을 뿐이다. 이후 1941년에 발표한 시에서 정지용은 더운 물을 다시 「온정」과 도 같은 일상적인 풍경으로 끌어내린다. 老主人의 腸壁에 無時로 忍冬 삼긴물이 나린다. 자작나무 덩그럭 불이 도로 피여 붉고, 구석에 그늘 지여 무가 순돋아 파릇 하고, 흙냄새 훈훈히 김도 사리다가 밖앝 風雪소리에 잠착 하다. 山中에 冊曆도 없이 三冬이 하이핳다. (강조: 인용자) ― 「인동차(忍冬茶)」 전문 “책력도 없이”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산중 어느 방 안에 노주인이 인동 차를 끓여 마시고 있다. ‘더운 물’로 끓인 인동차는 노주인의 몸으로 스며들 어 이름처럼 ‘겨울을 견디게’ 해준다. 「백록담」의 황홀경에 비하면 매우 소박한 장면이지만, ‘나’를 지켜주었던 「온정」의 온기가 인동차의 온기로 변주됨으로써 ‘더운 물’의 계보를 분명히 잇고 있다. 여기서는 다시 초기 시 - 113 - 편에서의 주제, 즉 차가운 바깥의 겨울을 견뎌야 한다는 명제가 ‘더운 물’을 중심으로 재편된다. 요컨대 ‘「온정」→「백록담」→「인동차」’로 이어지는 ‘더운 물’의 계보 는 정지용의 불 이미지가 물 이미지와 결합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후기 시 편은 박용철의 죽음과 관련하여 삶과 죽음의 이미지를 하나로 총체화하고 있음을 앞에서 이미 지적해 두었다. 삶과 죽음, 불과 물 등 언뜻 보기에 이 항대립적으로 보이는 개념들이 결합하면서, 박용철이 제시했던 모종의 ‘전일 체적 종합’이 정지용 시편에서 시도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불과 물의 결합 은 매우 연금술적인 결합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융에 따르면, 연금 술사들은 가장 전형적인 대극쌍인 물과 불이 결국 하나임을 증언하곤 한다. 예컨대 연금술의 ‘원질료’로서의 물을 의미하는 ‘영원한 물(aqua permanens)’의 개념은 “불의 형태를 한 순수한 물”로서 의미화된다는 것이 다. 224) 「인동차」에서 인동차가 끓여지던 공간은 ‘무시간(無時間)’으로서 “공간 화된 시간”이다. 이 공간화된 시간은 바깥 세계의 시간으로부터의 구속을 모두 끊어냈다는 점에서 “초월적 존재로서의 시간”이며 “정신적인 깊이인 내면공간을 상징”225)한다. 「인동차」의 내면공간은 초기의 중요한 내면공 간이었던 ‘카페 프란스’와는 또 다른 성격을 지닌다. 이 시에서는 ‘바깥에서 의 내향 의지’가 전혀 제시되지 않으며, 내면공간과 외적 세계 사이는 더욱 단절되어 있다. “밖앝 風雪소리에 잠착”한다는 것은 내면공간의 고요함과 외적 세계의 ‘소리’ 사이의 대비를 보여준다. 이렇게 더 단독화된 내면공간226)에서 인동차를 끓여주는 장치는 다름 아 닌 “자작나무 덩그럭 불”이다. 정지용 후기 시편에서 자작나무는 ‘백화(白 224) Jung, C.G., 『연금술에서 본 구원의 관념』, 한국융연구원 C.G.융저작번역위 원 역, 솔, 2004, 22쪽. 225) 김훈, 「「白鹿潭」의 시·공간」, 『정지용 문학 세계 연구』, 284쪽. 226) 윤의섭은 정지용의 후기 시편이 대부분 이러한 ‘무시간성’에 근거하고 있으 며, 이는 여행 기억 속에서 재창조된 “순수 현재”이자 “영원한 현재”로서의 의 미를 지닌다고 지적한다. 즉 현실 세계의 유한성을 초월한 ‘현재’를 상상하는 것으로, 정지용은 ‘죽음’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으로 나아가게 된다. 윤의섭, 앞의 책, 101~106쪽. - 114 - 樺)’라는 표현으로도 자주 등장한다. 「백록담」에서 그는 자작나무의 흰빛 으로부터 자신의 ‘죽음’에 대한 의식을 드러낸 바 있다. 그러나 자작나무의 흰빛은 소멸과 죽음의 상징이면서도, ‘성스러움’의 빛깔이다. 북유럽 신화나 켈트 족 신화에서 자작나무를 일컫는 이름들은 모두 ‘여신’의 의미를 지니 고 있고, 이는 ‘빛나는 나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부라(Bhura)와 어원이 같다. 즉 자작나무는 죽음의 상징이지만 동시에 ‘생명수’이기도 하다. 227) 자작나무 장작불이 다시 등장하는 「도굴(盜掘)」은 「인동차」의 몇 가 지 모티프를 변주한다. 「인동차」의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인 풍경과 달 리, 「도굴」은 제목에 드러나는 바와 같이 하나의 ‘사건’을 다룬다. 다만 정지용은 일견 비극적인 이 사건에서도 붉은 색채감을 활용해 ‘미학화’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홍역」에서도 “태고연히 아름다운” 석탄불이 비슷 한 아이러니를 산출했듯, 여기서도 “자작나무 화투ㅅ불”이 ‘미학화’의 중심 에 있다. 百日致誠끝에 山蔘은 이내 나서지 않었다 자작나무 화투ㅅ불에 확근 비추 우자 도라지 더덕 취싻 틈에서 山蔘순은 몸짓을 흔들었다 심캐기늙은이는 葉草 순쓰래기 피여 물은채 돌을 벼고 그날밤에사 山蔘이 담속 불거진 가슴 팍이에 앙징스럽게 后娶감어리처럼 唐紅치마를 두르고 안기는 꿈을 꾸고 났 다 모태ㅅ불 이운듯 다시 살어난다 警官의 한쪽 찌그린 눈과 빠안한 먼 불 사이에 銃견양이 조옥 섰다 별도 없이 검은 밤에 火藥불이 唐紅 물감처럼 곻 았다 다람쥐가 도로로 말려 달어났다. (강조: 인용자) ― 「도굴(盜掘)」228) 전문 「도굴」은 “심캐기늙은이”가 “당홍치마를” 두른 산삼 꿈을 꾸다가 어느 경관으로부터 총을 맞는 이야기 정도로 ‘줄거리’를 정리할 수 있겠으나, 사 실 뚜렷한 내러티브를 지니기보다는 유사한 이미지들이 중첩과 연쇄 작용을 일으키면서 시를 구성하고 있다. “심캐기늙은이”는 「인동차」의 “노주인”에 서 이어지는 ‘노인’ 모티프인데, 정지용 후기 시편에 이러한 노인들이 산재 227) 조영복, 앞의 책, 292~293쪽. 228) 『문장』 23호, 1941.1. - 115 - 한다는 것 역시 초기 시편의 아이 모티프와 대비되는 지점이다. 이 시에서 “자작나무 화투ㅅ불”은 “심캐기늙은이”에게 산삼순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기능을 한다. 장작불의 붉은빛은 꿈속에 등장한 산삼의 “당홍 치마”로 전이되며, 이것이 다시 경관의 총에서 빛나는 “화약불”로 연쇄된다. 이러한 이미지의 연쇄는 “당홍 물감처럼 곻았다”는 서술을 통해 아이러니로 끝맺는다. 정지용은 붉은빛을 의도적으로 배치했다. “경관의 한쪽 찌그린 눈 과 빠안한 먼 불 사이에 총견양이 조옥 섰다”는 구절은 경관의 화약불과 심 마니의 자작나무 장작불, 그리고 환기된 꿈속 산삼의 당홍 치마를 삼각 구 도로 잇는다.
'국어국문학, 풍월을 읊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연구 (0) | 2020.09.03 |
---|---|
대척점에 있는 자작나무 장작불과 화약불 그리고 아이러니 (0) | 2020.09.03 |
삽사리와 온정, 정지용 시의 존재론적 초월 양상 (0) | 2020.09.03 |
정지용 문학, 내면공간에 대한 천착과 다양하게 변주되는 불 이미지 (0) | 2020.09.03 |
바슐라르의 불과 상상력, 실존적 원동력 그리고 몽상 개념 (0) | 2020.09.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