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ikastos
바슐라르의 불과 상상력, 실존적 원동력 그리고 몽상 개념 본문
바슐라르 에게도 ‘불’은 단순한 상상력이 아니라 시 쓰기의 실존적 원동력이 되며(이 것이 바슐라르가 제시한 ‘몽상’ 개념의 요체일 것이다.), 바슐라르 역시 이를 불사조(피닉스)의 부활 이미지로 치환한다. 사실, 피닉스는 시 안에서, 시에 의해, 시를 위해, 끊임없이 살고 죽으며, 다 시 태어난다. 그 시적 형태는 다양하고 새롭기 그지없다. (…중략…) 그리고, 새로운 시인에게는 새로운 피닉스, 경이로운 불사조적 존재가 상응한다고 나는 확신한다. 201) ― 가스통 바슐라르, 「서론」, 『불의 시학의 단편들』202) 일부 201) Bachelard, Gaston, 『불의 시학의 단편들』, 안보옥 역, 문학동네, 2004, 78쪽. 202) 원제: Fragments d’une Poétique du Feu, 1988. - 101 - 다만 정지용에게서는 박용철과 바슐라르에겐 없었던 존재근원적인 ‘비애’ 의 사유가 더해진다. ‘무명화’ 같은 신비로운 필연성의 불길과 ‘불사조’처럼 부활하는 존재는 곧 ‘비애’의 다른 이름이다. 이 비애는 “나의 가장 안”에 철저히 내면화되어 있다. 비애를 시작(詩作)의 근거로 발견하는 일은 “가장 안”으로 침잠하기를 자처하는 내면적 주체의 ‘숭고한 고독’이 선행되어야 가 능하다. 여기서 ‘불사조’의 원형적 상징은 매우 흥미로운데, 삶과 죽음이 이 분법이 붕괴되는 불사조의 생리는 이후 후기 시편과 산문에서 드러나는 ‘죽 음’에 대한 태도로 이어지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정지용 시에서 ‘죽음’이 직접적으로 표면화된 것은 종교 시편부터라고 봐야한다. 물론 종교적 색채 가 덧칠되어 있기 때문에 현세 너머에 있는 ‘피안’의 세계로서 죽음이 인식 되는 경우도 있으나, 이러한 죽음의 인식은 시적 주체에게 ‘숭고함’을 체현 하게끔 하는 단초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는 곧 ‘내면의 숭고화’이며, 정지용이 시론을 통해 예술가의 존재론을 펼치게 되는 계기로서 작용한다. 「나무」는 “푸른 한울”을 향하면서도 “검은 흙”에 뿌리박은 ‘나무’의 존 재 형식에 대한 사유를 종교적인 어조로 노래한다. 여기서 특징적인 점은 화자가 숭고한 ‘위’를 찬양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대지로 끌어내리고 있는 ‘아래’ 역시 긍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의 존재는 우주의 한낫 초조한 오 점이엇도다”와 같은 구절은 분명 과도하게 종교적 색채에 침윤된 것이지만, 그러한 미미한 ‘나의 존재’는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피[“聖血”]에 이마를 적 시면서 “신약의 태양”을 한 아름 안는 존재로 거듭난다. 나의 나무-몸에 깃 든 위와 아래의 긴장 관계는 자신의 육체를 생경하고 신비스러운 것으로 인 식(“이상스런 나무 나의 몸이여!”)하게 한다. 그러나 화자는 이내 생경함을 극복하고 자기 존재 자체를 긍정한다.(“오오 알맛는 위치! 조흔 우 아래!”) 「불사조」와 「나무」는 종교 시처럼 보이는 외피(外皮)에도 불구하고, 실은 자기 존재의 ‘안’과 ‘위-아래’를 탐구하는 모습을 병렬적으로 제시한 일종의 ‘실험시’에 해당한다. 두 시의 주제가 결합하면 내면의 깊이와 높이 를 동시에 지닌 예술가적인 내면공간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일찍이 릴케에 게 ‘나무’는 시인/예술가와 동일시203)되었고, ‘세계내면공간’ 개념도 ‘나무’ 속에 위치한 공간으로서 등장했었다. 박용철도 이를 이어받아 “시인은 진실 - 102 - 로 우리가운대서 자라난 한포기 나무”(「시적 변용에 대해서」)라고 주장했 다. 「시적 변용에 대해서」에 나타난 주요 은유 체계 두 가지가 바로 ‘시 인-나무, 시적 필연성-무명화’라고 정리한다면, 정지용이 4년 전 『가톨릭 청년』에 동시에 게재한 이 시들은 박용철 시론의 핵심을 선취하고 있는 것 이나 마찬가지다. 이는 두 작가 간의 교류 양상을 좀 더 적극적으로 밝혀낼 만한 계기로 기대된다. 중기 시편에서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변화로는 ‘그대’라는 이인칭의 출현 이다. 이 ‘그대’가 어떤 가톨릭적인 경건함의 어조에서 호명된 것은 사실이 다. 정지용 시에서 ‘그대’는 이후 「슬픈 우상」과 같은 과도기적인 작품을 지나 후기 시편 중에서 가장 이른 작품인 「삽사리」와 「온정」까지 유지 되지만, 『문장』에 본격적으로 연루된 이후부터는 모습을 감춘다. 그러나 앞서 나열한 작품들은 모두 ‘종교 시’로 규정하기에는 어렵다는 점이 아이 러니한데, 정지용이 ‘그대’에서 종교적 외피를 걷어내고 오직 특유의 경건함 만 부여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방증이 될 터이다. 고요히 그싯는 손씨로 방안 하나차는 불빗! 별안간 다발에 안긴드시 올이처럼 일어나 큰눈을다 그대의 붉은 손은 바위틈에 물을 오다 山羊의 젓을 옴기다 簡素한 菜蔬를기르다 오묘한 가지에 장미가 피드시 그대 손에 초밤불이 낫도다 203) “예술가는 나무처럼 성장해가는 존재입니다.” 「세 번째 편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31쪽. - 103 - ― 「촉불과 손」204) 전문 “방안 하나차는 불빗”은 ‘방 안의 불’이라는 점에서 초기 시편에서의 불 이미지와 상통한다. 제목의 “촉불”이 바로 이 불을 가리킬 것이다. 다만 이 시에서는 초기 시편과 달리 방 안의 불이 아픈 아이와 결합하는 것이 아니 라, 촛불의 붉은 색채감이 “그대의 붉은 손”으로 옮겨간다. 마지막으로 “그 대 손에 초밤불이 낫도다”에 이르면 불은 “그대”에게 완전히 전이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지용은 촉각과 시각의 불일치를 탁월하게 활용하여 감 각적 이미지를 역설적인 의미로 밀어 넣는데, 본래 바위틈에서 물을 떠오다 가 너무 차가워 빨개진 “그대”의 손이 따뜻한 “초밤불”을 품은 것으로 표현 된다. 이를 “오묘한 가지에/장미가 피드시”라 하면서 “그대”를 장미나무와 같은 존재로 인식하는 모습도 보인다. 정지용 시에서 “그대”를 하나님 혹은 어떤 초월적 존재로 일대일 대응시키는 것은 많은 경우 무의미해지는 작업 이다. 무엇을 가리키든 간에, 정지용의 “그대”는 화자가 닿을 수 없는 경지 에서 특정 공간이나 대상을 보살펴 주는 존재로 자주 등장한다는 점이 중요 하다. 초기 시편의 ‘숯불’ 이미지도 아픈 아이를 보살펴 주는 존재였다. 그 러나 중기에서 불 이미지는 “그대”와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되면서, 숭고한 ‘영혼의 불’로서의 의미를 획득한다. 중기 시편에서 가톨리시즘의 영향보다 더 중요하게 논의되어야 할 것은, 이 시기의 시작(1931~1933년)이 박용철과의 교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때와 겹친다는 점이다.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일방적으로 영향을 주었 다기보다, 숱한 대화와 여행, 동인 활동을 거쳐 상호적으로 의견을 주고받 았을 것이다. 박용철의 ‘무명화’와 정지용의 ‘성화’ 사이의 유사성은 그런 맥 락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무명화’ 역시 「시적 변용에 대해서」에서는 매 우 종교적인(그러나 기독교적이지는 않은) 색채를 띠며 일종의 성전에서 타 오르는 불길인 것처럼 표현되는데, 이러한 ‘숭고함’의 사유의 공유는 릴케적 인 ‘고독(孤獨)’이 ‘고고(孤高)’로 전환되는 국면을 암시한다. 정지용의 시론 204) 『신여성(新女性)』 10권 11호, 1931.11 - 104 - 에서도 시인은 “고만(高慢)”해도 좋은 자리에 있다고 표현된다. 요컨대 중기 시편은 ‘내면의 위대함’을 체현하는, ‘고고’한 시인의 존재론이 본격화되는 시기였다. 내면으로의 깊이가 존재론적 높이로 환치되는 마술적인 변환은 초기에 제시된 ‘불’이 영혼 안에 거하는 것으로, 즉 ‘내재(內在)’의 처소가 이동하면서 가능했다. 이러한 존재론적 높이에 대해 사유할 수 있게 된 정 지용은 이후 후기의 고지(高地) 시편에 올라서서, ‘은일’이 아닌 높은 곳에 서 삶과 죽음 등 현실에서의 대립체들을 통합하여 사유할 수 있게 되는 단 독자205)로서의 경지를 획득하는 것이다. 3.3. 내면의 확장적 인식을 통한 후기 시편의 전개 초기와 중기 시편에서 엿보였던 내면공간에 대한 탐구는 후기에 이르러서 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인다. 끊임없이 자기 갱신을 시도해온 정지용 문학 이기에,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아득한 거리감은 불가피한 것이었을지도 모 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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