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ikastos
정지용의 아포리즘과 일본어 시편 본문
「시·개·동인」의 사람들이 모여있던 공간인 “북성관(北星館) 2층”에서 ‘북 성관’은 일명 ‘호쿠세이관’으로, 구마키 쓰토무에 따르면 고다마의 하숙집이 자 『자유시인』의 발행처였다.131)132) 정지용은 “사치스런 잡담”이라 표현 했지만, 「시·개·동인」의 내용을 볼 때 호쿠세이관은 문인들 사이의 사적 교류도 활발히 이루어지던 ‘연대’의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시란 개를 애무하는 것’이란 농담 섞인 정지용의 아포리즘은 이러한 교류 가운데 나온 것인데, 이는 「카페―·프란스」에서의 “이국종 강아지”를 강하게 연상시킨 다. 이 시에서는 ‘내가 개를 애무하는 것’이 ‘개가 나를 애무해주는 것(“내 발을 할터다오”)’으로 미묘하게 뒤바뀌어 있을 뿐이다.133) 129) 일본어 시편까지 포함한다면, 현재까지 정지용의 최초 발표 시편은 「신라의 석류(新羅の柘榴)」로 확인된다. 이 작품이 발표되었던 지면이 바로 『街』 (2권 3호, 1925.3.)다. 「신라의 석류」는 1927년 『조선지광』에 「석류(柘榴)」로 재발 표되기도 했다. 130) 구마키 쓰토무(熊木勉), 「鄭芝溶と『自由詩人』」, 植民地朝鮮の文学 文化と 日本語の言説空間(2) 심포지엄 발표문, 2014.7.5., 6쪽. 131) 구마키 쓰토무, 위의 글, 7쪽. 132) 김동희의 추론에 따르면, 호쿠세이관은 교토부립식물원 부근에 위치해있었 을 것이며 정지용의 하숙집 역시 이곳과 멀지 않았을 것이다. 김동희, 「정지용과 ‘교토’라는 장소」, 『한국시학연구』 45호, 한국시학회, 2016, 134쪽. 133) 다만 마지막 연에서 시적 화자가 “오오. 이국종 강아지야”라고 부르며 먼저 - 67 - 정지용은 대개 중기 이후(즉 『가톨릭청년』 창간 이후)에 산문을 창작 및 발표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초기에도 6편134)이나 되는 일본어 산문을 남겨 놓았다. 이 시기 산문들은 정지용의 다른 산문들에 비해 다소 이질적 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1939년을 전후로 한 후기에 발표된 산문들은 2.3.에 서 인용한 「설문답」에서 알 수 있듯, 산문 양식에 대한 정지용의 자각적 의식에 근거하여 창작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자각은 「소묘(素描)」 를 위시한 중기 산문에서 이미 실마리를 보인 것이기도 하다. 정지용은 「소묘」에서부터 시 창작방법론을 본격화135)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정지용의 초기 일본어 산문들은 한참 뒤 자신이 비판 했던 ‘글이 아니라 이야기 같은 산문’에 훨씬 가까워 보인다. 이때는 ‘산문 성’에 대한 의식이 확립되지 않았던 시기였으므로, 자신의 감정과 심리를 진솔하게 표현하는 이른바 ‘경수필’을 주로 썼던 것이다. 「정거장」과 같은 글은 특히 정지용의 심리 상태를 여과없이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이 시기 에 창작된 「시·개·동인」이 「카페―·프란스」와 상호텍스트적 관계에 있다 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한데, 「카페―·프란스」의 배후에 놓인 정지용의 의도와 맥락을 「시·개·동인」에서 비교적 정확하게 대응해볼 수 있기 때문 이다. 만일 「시·개·동인」이 「카페―·프란스」이 창작 배경이 될 수 있다 면, 136) ‘카페 프란스’는 슬픔과 고립의 공간이라기보다 오히려 “우리들은 힘 내면서 간다면 좋다”는 선언이 발화되는 ‘호쿠세이관’과 비슷한 연대의 공간 개를 쓰다듬었을, 즉 ‘애무’했을 가능성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즉 「카페―· 프란스」에서 애무의 주체와 대상이 완전히 도치되었다기보다는, 시적 화자가 개에게 ‘애무의 상호교환’을 요청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134) 「詩·犬·同人」, 「停車場」, 「退屈さと黑眼鏡」, 「日本の蒲團は重い」, 「手紙一 つ」, 「春三月の作文」. 135) 허윤, 「정지용 시와 가톨릭문학론의 관련 양상 연구」, 서울대학교 국어국문 학과 석사학위 논문, 2012 20쪽. 136) 물론 「시·개·동인」이 「카페―·프란스」보다 한 달 먼저 발표되었기 때문에, 「카페―·프란스」가 먼저 창작되고 이에 대한 후일담의 일환으로 「시·개·동인」이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이 역시 어디까지나 ‘발표 일자’에 근거를 둔 추 측이므로, ‘창작 일자’를 고려한다면 여전히 「시·개·동인」이 먼저 쓰였을 가능 성도 배제할 수 없다. - 68 - 이 된다. 산문에서 언급된 ‘고다마, 야마모토, 마쓰모토’ 등의 이름들은 시에 서 ‘루바쉬카, 보헤미안 넥타이’ 따위를 입은 “이 놈”들에 해당한다. 정지용 의 ‘카페 프란스’가 이상의 ‘제비다방’ 혹은 오페라 『라 보엠』의 ‘카페 모 뮈스’처럼 예술가 공동체가 결성되는 혁신적 공간이었다는 신범순의 지 적137)을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카페들은 어느 연구의 지적처럼 “또 다른 떠남을 위한 임시적 거처로서의 노마드적 공간”138)과는 거리가 멀다. A 옴겨다 심은 種蠡나무 미테 빗두루 슨 장명등. 카̇페̇―̇·프̇란̇쓰̇에 가자. 이 놈은 루̇파̇스̇카̇. 한놈은 보̇헤̇미̇안̇네ㄱ타이. 적 마른놈이 압장을 섯다. 밤ㅅ비는 배ㅁ눈 처럼 가는데 페̇이̇브̇메̇ㄴ̇트̇에 흐늑이는 불빗. 카̇페̇―̇·푸̇란̇쓰̇에 가자. 이 놈의 머리는 갓익은 능금. 한놈의 心臟은 벌레먹은 薔薇. 제비 처름 저진 놈이 여간다. B 「오―파로트 (鸚鵡)서방! 굿 이부닝!」 137) 신범순, 「카페에서의 사색 1―와 로부터 의 절 정에 이르는 길」, 서울대학교 2018년 2학기 ‘한국현대시론’ 강의록, 2018.10.11., 7쪽. 138) 이형권, 「정지용 시의 ‘떠도는 주체’와 감정의 차원: 시적 자아의 이국정조 와 슬픔을 중심으로」,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19권, 한국문학이론과 비평학회, 2003, 86쪽. - 69 - 「이 부 닝!」 ―이 친구. 엇더 하시오?― 추립브(鬱金香)아가씨 는 이밤 에도 更絲 커̇―̇튼̇미테서 조시는 구려. 나 는 子爵의아들 도 아무것도 아니란다. 남달니 손 이 희여서 슯흐구나. 나 는 나라도 집도 업단다. 大理石 테̇이̇불̇에 닷는 내 ㅁ이 슯흐구나. 오오. 異國種 강아지 야 내 발을 할터다오. 내 발을 할터다오. ― 「카페―·프란스」 전문 ‘카페 프란스’는 교토에 실존하던 카페가 아니라 「시·개·동인」에서 언급 된 ‘호쿠세이관’을 모델로 삼은 상상적 공간일 가능성이 있다. 물론 실존하 는 특정 카페를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같은 산문의 후 반부에서도 “신미래파처럼 구는 마쓰모토”가 ‘카페’를 언급하는 대목이 있 다.139) 다만 ‘카페 프란스’의 실존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당시 예술가들에게 상징적인 공간이었던 ‘카페’와 실질적인 공동체 공간이었던 ‘호쿠세이관’의 139) 김동희는 당시 교토의 번화가였던 시조(四條) 거리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이 는 ‘고마도리 찻집(コマ ドリ喫茶店)’이 ‘카페 프란스’와 가장 유사한 곳이었다 고 추론한다. 실제로 정지용의 다른 산문(「다방 고마도리 안에 연지찍은 색씨 들」, 『삼천리』 96호, 1938.6.)에서도 이 카페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바 있기 때 문이다. 김동희, 「정지용과 ‘교토’라는 장소」, 122~128쪽. - 70 - 이미지가 결합되어 ‘카페 프란스’가 만들어졌다는 추측은 여전히 유효하다. 논의가 다소 길어졌으나, 그만큼 ‘카페 프란스’란 공간을 이해하는 문제는 이후 정지용에게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안―밖’의 분할 구도를 이해하는 문 제와 직결되기에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카페―·프란스」에서 A와 B가 각각 ‘카페 프란스’의 바깥 풍경과 내부 풍경에 해당됨은 어렵지 않게 확인 된다. 전술했듯 ‘카페 프란스’가 ‘호쿠세이관’과 같은 보다 능동적·긍정적 공 간으로 의미화될 수 있다면, “카페―·프란쓰 에 가자”는 구호와 A에서 B로 옮겨가는 시선의 전환은 결국 ‘밖’에서 ‘안’으로 향하고자 하는 내향(內向) 의지, 즉 외적 조건들의 구속력을 끊어낼 수 있는 ‘내적 공간’을 구성하고자 하는 작가적 태도와 관련이 깊다. 정지용의 초기 시편에 자주 등장하는 ‘방(房)’ 혹은 ‘집’은 시적 주체를 안 주시킬 수 있는 ‘내적 공간’의 표상이다. 초기 시편은 단일한 경향으로 환원 될 수 없을 만큼 주제적·양식적으로 다양한 모습을 띤다.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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