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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시편과 산문의 정신주의적 측면과 시적 수사법 본문

국어국문학, 풍월을 읊다

정지용 시편과 산문의 정신주의적 측면과 시적 수사법

②℃ 2020. 9. 2. 03:00

이는 아마도 후기 시편과 산문에서 보이는 정지용의 ‘정신주의’적 측면과 그것을 선명한 심상으로 표현해내는 시적 수사법을 종합하려는 의도에서 발생한 관 례일 것이다. 그러나 선명한 가시화 이전의 단계라 할 수 있는 ‘가시적인 것의 비가시화’가 시작(詩作)에 있어서는 더욱 본질적인 것이며, 정지용과 박용철은 시론에서 릴케를 끌어들이며 이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정지용이 취한 방법론을 릴케와 견주어보는 작업은 단순한 수용사적 의미만을 지니지 않는다. ‘비가시화’의 방법론은 가톨릭이나 동양 사상 등으로 일괄되던 정신 주의 혹은 신비주의의 소산은 아니라는 점을 설득력 있게 밝혀낼 수 있기 때문이다. 박용철은 릴케의 시를 조선 문단에 최초로 소개한 장본인이라 할 수 있 다. 박용철 이전에 1916년과 1934년에 각각 한 번씩 다른 지면에서 릴케의 이름이 언급58)되긴 했지만 구체적으로 작품이 소개된 것은 아니며, 최초의 릴케 번역으로 기록된 김진섭(金晋燮)의 글도 시가 아니라 산문의 번역이었 다.59) 박용철은 1936년 6월 『여성』지에 (마리아께 드리는)「소녀의 기도 Gebete der Mädchen zur Maria」라는 제목의 릴케 시를 최초로 번역하여 게재했다. 60) 그러나 그가 1923년 도쿄외국어학교 독문학과에 입학61)했었다 57) 대표적으로 전세진은 정지용이 「시와 언어」에서 언급한 “incarnation적 일 치”를 ‘육화(incarnation)적 이미지’를 만드는 과정으로 고찰하고, “육화란 비 가시적인 것의 가시화라는 신비의 현현을 나타내는 것”으로 설명한다. 전세진, 「정지용 시에 나타난 육화적 이미지 연구」,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석사학위 논문, 2017, 1쪽 참조. 58) 다만 1934년의 경우, 릴케가 언급된 지면이 『가톨릭청년』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지하듯 『가톨릭청년』은 정지용이 주축이 되어 발간한 천주교 기관지였다. 59) 이때 번역된 릴케의 산문은 오늘날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로 알려져 있는 서간문 중 하나로 추정된다. 물론 이 글은 릴케의 ‘내적 필연성’ 개념이 담긴 중요한 텍스트며, 박용철도 이후 평론에서 인용한다. 60) 이상 한국의 독일문학 수용사에 대해서는 다음 자료를 참조하였다. 안문영, 「한국 독문학계의 릴케 수용」, 차봉희 편, 『한국의 독일문학 수용 100년(2)』, 한신대학교출판부, 2001, 97~98쪽. 61) 김학동, 『박용철 평전』, 새문사, 2017, 46쪽. - 22 - 는 사실을 고려하면, 오래 전부터 이미 릴케의 글들을 탐독하고 있었을 가 능성이 높다. 릴케를 향한 정지용과 박용철의 호명은 조선 문단에의 릴케 수용과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셈이다. 그러나 정지용 문학의 본령을 릴케 수용 이전과 이후로 양분하여 규정하 는 것은 정당하지도 않을뿐더러, 시기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부적절하다. 본 고에서 정지용이 릴케적 내면 개념과의 공명을 드러낸 글로 보고자 하는 1939년에 발표된 일련의 시론들은, 이미 많은 시편들이 창작된 이후인 후기 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고는 정지용과 릴케와의 접점을 단순한 수용사적 측면에서 재단 하는 관점을 지양하고, 정지용이 초기 시편에서부터 이미 독자적인 ‘내면 탐구’의 주제를 표출하고 있었음을 주장하고자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정지용의 시는 일종의 메타시(Metapoetry)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내면의 발견을 통해 어떻게 시를 쓰고 시인으로서 살아갈 것인가?’의 물음이 정지 용의 문학 저변에서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릴케와의 접점은 이러한 시학적 입장을 확정하는 계기로서 작동된다. 1930년대 기교주의 논쟁과 박용철의 논의는 정지용 시학의 완성과정을 문학사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는 좋은 근 거가 된다. 2장은 정지용의 ‘내면의 시학’이 비평적으로 그리고 문학사적으로 완성되 어 가는 경위를 면밀히 분석한다면, 3장에서는 그러한 비평 작업과 병행 혹 은 그 이전부터 전개되고 있었던 정지용 시편의 ‘메타시’적 주제를 논하고 자 한다. 정지용 시의 시적 주체는 초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일관적으 로 어떤 존재의 내면 혹은 내재성(內在性)을 인식하고 탐구하고자 하는 움 직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내면 탐구의 시학적 주제는 ‘불’ 모티프의 다양한 변주에 의해 추동된다. - 23 - 2. 박용철·릴케와의 공명을 통한 ‘내면공간’의 시학 정립 2.1. 기교주의 논쟁과 ‘기술(技術)’에 대한 제안 앞서 여러 번 언급한 바와 같이, 정지용은 1939년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시론적 입장을 완성된 글 형태로 정리하여 발표한다. 조선 문단에 데뷔한 지 10여 년이 넘도록 시에 대하여 구체적인 논평을 멀리해온 셈이다. 이는 임화와 김기림, 심지어 가장 절친했던 박용철 등의 동료 시인들이 당대 시 문학 담론에 발빠르게 관여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특히 1930년대 는 일제의 억압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면서 다종다양한 문학 담론들이 출 몰했다. 많은 동인들이 이합집산을 반복하고 의견 대립이 심화되던 혼잡한 상황, 그리고 이러한 혼잡이 사그라들던 1939년에서야 수면 위에 떠오른 정 지용의 시론 사이에는 별다른 연관관계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정지용의 시는 당대 담론에서 논란의 중심에 위치해 있었다. 이는 매우 흥미로운데, 당시 정지용은 파격적으로 등장한 신인이라기보다는 이미 기성시인으로서 입지를 다지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1935년 『정지용시집』의 발간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많은 문인들에게 중대한 사건으로서 인식된다. 정지용의 시는 어느 한쪽의 논리 로도 단일하게 설명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정지용의 시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는 자신의 유파(流派)를 옹호하거나 다른 논리를 비판하는 데에 유용했던 질문이었다. 1935년부터 1936년에 걸쳐 임화·김기림·박용철 사이에서 전개된 이른바 ‘기교주의(技巧主義) 논쟁’이 이러한 형국을 가장 잘 보여준다. 이 논쟁은 공교롭게도 『정지용시집』이 발간된 직후에 발생하였으며62), 논쟁에서 당 62) 기교주의 논쟁의 시발점을 김기림의 「시에 있어서의 기교주의의 반성과 발 전」(『조선일보』, 1935. 2. 10~3.14)으로 볼 경우, 『정지용시집』의 발간보다 시 기적으로 앞에 위치한다. 『정지용시집』은 1935년 10월에 발간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논쟁’의 형식이 취해지기 시작한 것은 김기림의 위 글보다는 임화 의 「담천하의 시단 1년」(『신동아』, 1935. 12.)에서였다. ‘기교주의’란 용어를 최초로 문제시한 쪽은 김기림이지만, 이를 논쟁화하여 보다 ‘유파성(流派性)’의 - 24 - 사자들을 제외하고 가장 많이 거론되었던 인물이 바로 정지용이었기 때문이 다. 이후 임화와 박용철 사이의 갈등이 첨예해지는 데에도 ‘정지용 시에 대 한 가치평가’가 주된 쟁점으로 작용했다.63) 이는 단순히 서로 다른 가치평 가의 충돌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1930년대의 시인들의 전대(前代)의 ‘신시’ 로부터 변별성을 확보하려고 할 때, 즉 신시가 주관했던 ‘새로움’[新]의 의 미를 재고하고 ‘현대시’를 수립할 때 정지용이 자주 거론된 것이다. 따라서 “‘현대시’의 전범(典範)으로 꼽히는 그의 시가 과연 조선 시의 발전과 진보 를 보여주는지를 따져 묻는 것은 당시로선 피해갈 수 없는 질문”64)이었다 고 할 수 있다. 다만 정지용은 단지 이 논쟁에서 중요한 교두보 역할만 했던 것은 아니 다. 좀 더 시간이 흐르면, 역으로 기교주의 논쟁이 1939년 이후 발표되는 정지용 시론에 대한 문학사적 배경으로 의미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정지용의 시론은 당대 담론들과의 연속선에서 해석되어 오지 못했다. 그 이 유는 이 절의 첫 문단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시론이 발표되기 전 정지용의 침묵이 너무 길었던 탓이 컸다. 선행연구에서도 정지용의 시를 해석하기 위 한 방법론으로 동원되거나, 박용철의 시론 혹은 낭만주의적인 유기체 시론 을 소극적으로 추수한 결과 정도로 인식되어 온 것이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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