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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의 내면과 고독한 자 그리고 바슐라르의 시인의 몽상 본문

국어국문학, 풍월을 읊다

릴케의 내면과 고독한 자 그리고 바슐라르의 시인의 몽상

②℃ 2020. 9. 2. 02:00

그래서 릴케에게 ‘고독한 자’는 44) Rilke, R.M.,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김재혁 역, 고려대학교출판부, 2006, 57쪽. 45) 릴케의 ‘내면’과 유사한 개념으로 시인의 ‘몽상’을 제시한 바슐라르 역시, 우 리 내부의 몽상에 잠긴 상태가 ‘세계 속에 던져진 것’과는 다르다고 단언한다. Bachelard, Gaston, 앞의 책, 318쪽 참조. 또한, 바슐라르에게 이와 같은 몽상적 고독의 상태는 몽상자의 ‘특권’에 가깝 다. Bachelard, Gaston, 『몽상의 시학』, 김웅권 역, 동문선, 2007, 202쪽 참조. 46) 말하자면 ‘고독’은 주변의 것들과 거리를 두게 됨으로써 ‘거리의 파토스’를 수반할 수밖에 없는 상태다. 이러한 점에서, 릴케의 고독은 니체의 고독, 즉 ‘차라투스트라의 고독’ 모티프와 비교해볼 만하다. 니체에게 거리의 파토스는 자기를 극복하는 삶의 원동력이다.(김주휘, 2015) 차라투스트라의 고독은 산정 (山頂) 위에서의 고독이다. 산 아래의 ‘약한 자들’로부터 수직적인 거리감을 느 끼면서, 고독과 환희가 쌍생아처럼 형성된다. 릴케의 고독도 수직적인 거리감 과 관련이 있지만, 그것은 산 위의 고독이 아니라 가장 깊고 어두운 곳에서의 - 18 - 상당히 높은 지위에 올라서 있다. 내면적 고독은 시인이 시를 쓰게끔 하는 ‘필연성’(Notwendigkeit)에 닿고자 하는 목적을 지닌 고독이다. 시는 누군가 에 의해서 혹은 외부 조건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쓰일 수 없다. 릴케에 따르 면 ‘시를 반드시 써야만 한다’는 필연성은 깊은 내면에서만 발견된다. 시인 은 “이 필연성에 의거하여”47) 삶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이것은 아이를 잉태 하여 낳는 것과 같아서, “깊은 겸손과 인내심을 갖고 새로운 명료함이 탄생 하는 시간”48)을 요구한다. 시인이 존재 내부로 깊게 파고 들어가는 행위는 바로 필연성을 발견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그런데 이 ‘고독한’ 내면의 공간은 외부 세계의 수많은 존재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뒤바뀌어 있기에, 불가해하며 비가시적인 공간이다. 내면공간으로 뛰어드는 시인의 작업은 따라서 그 어떤 행위보다 모험적이다. 릴케는 이렇 게 내면공간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혹은 이 공간에서 세계의 모습이 치명 적인 전환을 감행하는 것을 ‘변용(變容, Verwandlung)’이란 개념으로 일컬 었다. 언제나 변용 속으로 들어가고 나와라. 너의 가장 쓰린 경험이 무엇이던가? 그 영양분으로 강한 것으로 자라나리라. 49) (강조: 인용자)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오르페우스를 위한 소네트」 제2부 ⅩⅩⅠⅩ 일부 고독이다. 위―아래의 대립 구도는 밖―안의 구도를 환유적으로 가리킨다. 니 체의 ‘높은 고독’과 릴케의 ‘깊은 고독’은 거울상이면서도, 서로 낙차가 크다. 니체는 인간의 내면화를 곧 “인간의 왜소화”(『도덕의 계보』 참조.)라는 부정적 인 측면으로 보기 때문에, ‘깊은 고독’을 긍정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김주휘, 「니체와 프로이트: ‘내면화’ 테제의 비교 고찰―‘힘에의 의지’와 ‘죽음 본능’의 차이를 중심으로 ―」, 『니체연구』 27호, 한국니체학회, 2015, 18쪽. Nietzsche, F.W., 『도덕의 계보/이 사람을 보라』, 김태현 역, 청하, 1987, 51쪽. 47)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14쪽. 48)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31쪽. 49) 『릴케 전집 2: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외』, 544쪽. - 19 - 사물이 시가 되려면, 그리고 인간이 시인이 되려면 주저 말고 ‘변용’을 거 치라고 릴케는 단언한다. ‘변용’은 시인에게 끊임없는 자기 극복의 과정이며 구도(求道)의 과정이다. 또한, ‘가시적 세계’로부터 ‘비가시적 세계’로의 전 환을 주도하는 의미로서의 변용이다. 이러한 변용을 성취하여 비가시적 차 원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얻게 된 존재, 바로 세계내면공간의 주민으로 자 리 잡게 된 존재가 『두이노의 비가』의 ‘천사’ 50)로 대변된다고 할 수 있 다. 51) 비가시성으로 향한다는 것을 ‘변용’보다 더 잘 보여주는 개념은 ‘전환 (Wendung)’이다. 시 「전환」은 ‘보는 것’의 한계를 넘어서 비가시적 내면 으로 향하는 마술적인 장면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보아라, 직관의 한계가 있고. 직관된 세계는 사랑 속에 피어나고 싶어하니까. 시선의 작품이 만들어졌으니, 이제 가슴의 작품을 만들어라 그대 안의 형상들, 붙잡힌 형상들에 ; 그대는 이것들을 압도하기에 : 하지만 이제 그대는 이것들을 알지 못한다. 보아라, 내면의 사내여, 그대 내면의 소녀를, 수천의 본질로 만들어낸 이 소녀를, 비로소 만들어진 이 소녀, 하지만 아직껏 사랑을 받지 못한 이 피조물을. 52) (강조: 인용자) 50) 릴케는 자신의 천사 모티프가 ‘기독교적인 천국의 천사’와는 전혀 무관하며, 오히려 이슬람교의 천사상과 관련 있다고 진술한 바 있다. 『두이노의 비가』의 천사는 실제로 신을 대변한다는 기독교적 천사의 이미지와는 다른 모습을 띤 다. 다만 가톨릭 모티프를 시에 곧잘 차용한 릴케의 창작 성향으로 미루어볼 때, 적어도 ‘천사’란 용어는 성서의 영향권 내에서 착상되었을 것이다. 즉 릴케 의 ‘천사’는 천사를 둘러싼 여러 사유와 이미지들이 어우러져 형성된 릴케만의 고유한 ‘천사’ 개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김자성,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에 나타난 천사의 본질」, 『헤세연구』 9권, 한국헤세학회, 2003, 106쪽 참조. 51) 위의 논문, 107~109쪽. 52) 『릴케 전집 3: 완성시(1906~1926)·프랑스어로 쓴 시』, 102~103쪽. - 20 -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전환」 일부 이 시는 “시선의 작품”으로부터 “가슴의 작품”으로 나아가라고 요청하 고 있다. 두 표현의 원어는 “Werk des Gesichts”와 “Herz-Werk”인데, 각 각 ‘보는 작업’과 ‘마음의 작업’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대상을 파악하고 분석 하는 ‘보는 작업’과 달리, ‘마음의 작업’은 대상과 주체가 하나가 되도록 한 다. 53) 다만 내면에서의 ‘시 쓰기’는 쉽게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다. 릴케는 시의 제목과 함께 “내면에서 위대함으로 이르는 길은 희생을 통해서 간 다”54)라고 써두었는데, 이는 그의 친구이자 오스트리아 철학자·문화비평가 인 루돌프 카스너(Rudolf Kassner)에게 바치는 글이었다. 이 ‘희생’에 대하 여 릴케는 다른 글에서 “무한한 사랑”이라든가 “자신의 가장 순수한 내적 가능성을 실현시키려는 시도”라고 설명한 바 있다. 55) 즉 사물을 ‘보는’ 방식 을 과감하게 버리고 사물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거듭나야 위대한 내면공간 으로 진입할 수 있다. 가시적인 것으로부터 비가시적인 것으로의 변용은 이 러한 차원에서 이해된다. 비가시성이란 단순히 보이지 않고 불분명한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가시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 즉 표피적이고 파편적인 인식 작용으로 세계의 근원을 이해하지 못하게 만드는 현상을 극복하는 대 안인 것이다. 이는 ‘내면공간’ 안에서 가능한 작업이고, 여기서의 변용 및 전환은 블랑쇼가 지적하듯 ‘번역’과 같은 것이다. 표피적 세계의 언어를 내 밀한 내부의 언어로 옮겨주는 내면공간은 일종의 변형 장치이며 시인은 “본 질적 번역자”이다. 이것이 시의 본질이며, 내면공간은 “시의 공간이다.”56) 릴케 시의 제반 개념들, 예컨대 ‘내면공간’, ‘변용’ 그리고 ‘전환’ 등을 다 소 번잡하게 살펴본 까닭은 이것이 정지용과 박용철의 시론이 공유한 핵심 과 밀접하게 조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들의 시론은 모 두 ‘가시적인 것의 비가시화’를 지향하고 있다. 앞서 1.1.에서 언급한 선행 53) 김자성, 앞의 논문, 105쪽. 54) 원문 표현은 다음과 같다. “Der Weg von der Innigkeit zur Größe geht durch das Opfer.” 55) 최연숙, 앞의 논문, 199쪽. 56) Blanchot, Maurice, 앞의 책, 202쪽. - 21 - 연구를 상기해보면, 정지용 문학 연구는 대부분 정지용이 ‘비가시적인 것의 가시화’를 방법론으로 삼았음57)을 지적하는 데에 그친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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