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ikastos
내면의 총체성, 경험과 체험의 구분 본문
내면의 총체성은 ‘체험’으로서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과 정을 통해서만 마련될 수 있다. 이때 ‘체험’을 ‘경험’과 구분하는 것이 중요 한데, ‘경험’이 단순히 과거에 겪은 일들을 가리킨다면 ‘체험’은 과거-현재미래를 포함한 시간과 공간을 광범위하게 겪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98) 이 러한 총체적 행위로서의 ‘체험’은 시를 쓰는 데에도 중요하다. 바슐라르에 따르면 시적 상상력으로 구성된 공간 안에서 우리는 직접 ‘살아’99)간다.100) 그래서 시는 ‘삶’의 문제와 유리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긴밀해지며, 이것 이 박용철이 말하고자 한 ‘체험’과 ‘전생리’의 가치다. 97) 전동진, 「용아 박용철의 ‘언어관’에 대한 연구」, 『호남문화연구』 62호, 전남 대학교 호남학연구원, 2017, 86쪽. 98) 김민지, 앞의 논문, 51쪽. 99) 『공간의 시학』에서 바슐라르가 ‘산다’[生]고 서술한 표현들 대부분에, 한국어 역자는 ‘체험(體驗)’이란 말을 병기하고 있다. 이는 프랑스어 동사 ‘vivre’가 지 닌 다의성(더 정확히는 그러한 다의성을 의도적으로 활용한 바슐라르의 의도) 을 염두에 둔 번역이다. ‘vivre’는 다의어로서, ‘살다’라는 기본 의미 외에 ‘체 험하다’라는 의미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100) Bachelard, Gaston, 『공간의 시학』, 69쪽. - 49 - ‘체험’이나 ‘전생리’가 육체의 영역(감각)과 마음의 영역(감정, 지성) 사이 의 경계를 없앤다고 할 때, 인간 주체의 내면 역시 두 영역이 하나로 통합 된 총체적 공간인 것이다. 이는 본고의 1.2.에서 다루었던 릴케의 ‘내면공 간’ 논의가 충분히 함의했던 내용이었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내면공간 안 에서 ‘시적 필연성’으로 작용하는 ‘무명화’의 모티프도 정지용에게서 이어진 다는 것이다. 다만 ‘무명화’의 ‘내재하는 불’의 이미지는 정지용의 시론보다 는 시에서 유사하게 발견되는데, 이것을 설명해야 하는 문제가 남는다. 주 지하듯 정지용 시는 「시적 변용에 대해서」에 훨씬 앞서서 창작되기 시작 했다. 정지용은 30~40년대 문학사에서 당파성 논리에 함몰되지 않았으나, 유일 하게 문학적 관계 및 사적 관계 양편으로 박용철과 동질성을 가진다. 즉 30 년대 말의 정지용 시론과 박용철 시론 사이에 보이는 유사성은 단기적인 혹 은 단편적인 영향 관계로만 설명될 수 없다. 박용철의 사망 이후 정지용이 자신의 시학적 사유를 글로 정립하기까지, 그는 박용철과 그리고 그의 글들 과 내적인 주고받기를 하며 생각을 정리하고 다듬었던 것으로 보인다.101) 또한, 두 사람의 관계를 일방향적인 것으로 보기 어렵다면, 박용철 시론에 드러난 일련의 개념들이 오히려 정지용과의 교류에서 영향을 받아 탄생했을 수 있는 것이다. 정지용이 초기 시에서부터 이미 ‘내재하는 불’ 이미지를 탐 색하고 있었던 사실을 상기할 만하다. 「시적 변용에 대해서」의 ‘무명화’는 그러한 시적 이미지를 비평적 이미지로 ‘번역’한 결과일 가능성이 있다. 확실한 것은 정지용이 시를 ‘회임(懷妊)’과 ‘출산’의 과정으로 보거나 시적 기다림(‘체험’과 유사한)을 중시하는 태도 등은 박용철의 논법을 이어가는 것으로, 둘의 교호를 넘어 시문학파적 동근성(同根性)이 분명히 발현되었다 는 것이다. 102) 다만 이러한 동근성을 드러내는 정지용의 시론들이 이미 『문장』에 합류하고 난 뒤에 더욱 열렬히 발표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박용철과 유사한 시적 사유들은 이미 정지용만의 시학 원리로 굳어졌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독자적 시론을 구축한 박용철과 달리 정지용은 비평가 101) 이명찬, 『1930년대 한국시의 근대성』, 소명출판, 2000, 329쪽. 102) 위의 책, 332쪽. - 50 - 로서 정신주의와 형식주의 사이에서 머뭇거렸다는 평가103)는 그리 정확하지 않다. 본고에서는 다음의 논의에서 정지용이 자신의 시론을 통해 박용철을 어떻게 추모하고 동시에 계승하는지, 그리고 릴케적 사유가 더 강화된 시론 이 어떻게 독자적 경지까지 이르고 있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2.3. ‘안으로는 열(熱)’한 것과 내면의 ‘조각법’ 모색 「시적 변용에 대해서」는 비평가 박용철의 이력에 있어서 중요한 분기점 이 될 만한 글이었다. 그러나 글이 발표된 해 5월, 박용철은 아까운 나이에 생을 달리한다. 시문학파 동인은 물론 해외문학파도 주축이 되어, 그의 장 례를 치른 직후 『박용철전집』 준비에 착수했고 이듬해와 그 이듬해 각 5 월에 1권과 2권을 차례로 출간했다. 104) 그뿐만 아니라 정지용과 김영랑 등 은 전집 출간 이후에도 박용철에 관한 몇몇 산문을 남기면서 이른바 ‘추모 적 창작’을 이어갔다. 105) 이러한 추모의 열기는 생전에 고인이 본인의 시집 출간은 마다하면서 지용과 영랑 두 사람의 시집에 온 열의를 쏟은 것에 대 한 보은과도 같았다. 특히 정지용에게 특징적인 점은, 박용철 사후에 수필 형식의 산문뿐만 아 니라 평론적인 산문을 집필하고 발표하는 빈도가 비약적으로 늘었다는 것이 다. 『문장』에 일련의 평문을 발표하기 시작한 것은 1939년 6월 「시의 103) 음영철, 「박용철과 정지용의 시론 대비 연구」, 『예술인문사회융합멀티미디어 논문지』 6권 4호, 사단법인 인문사회과학기술융합학회, 2016, 437쪽. 104) 김학동, 『박용철평전』, 87쪽. 105) 김영랑은 「박용철과 나」(『박용철전집』 후기), 「인간 박용철」(1939.12), 「문 학이 부업이라던 박용철 형」(1949.10.1) 등 제목부터 애도 감정이 절절히 드러 나는 글들을 몇 편 발표했다. 「인간 박용철」에서는 『시문학』이 “당시 시단의 한 경이(驚異)”였다고 회고한다. 또한, 『시문학』뿐만 아니라 『문예월간』과 『문 학』 등 다수의 문예지 편집을 담당했던 박용철을 ‘명편집인’이라 일컬으며 그 이 탁월한 편집 능력을 상찬하기도 한다. 김학동,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 같이―김영랑 전집·평전』, 새문사, 2012, 174~182쪽 참조. - 51 - 옹호」를 그 기점으로 삼는다고 할 수 있는데, 같은 해 정지용은 어느 문예 지에서 주관한 설문에서 당대 산문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2. 진부평속(陳腐平俗)한 시정설화(市井說話)에서 30년간 저회(低廻)하는 소 위 언문일치(言文一致)를 산문으로 인정할 수 없다. 산문이야말로 가장 타당한 문장(文章)이다. 그들의 언문일치에서는 하등의 정신(情神)을 느낄 수 없다. 문장과 정신에서 낙오한 것은 이 아니라 다. 무식한 이야기꾼 이 너무 많다. 진정한 산문정신에 목말러가는 이에게 기달려 주기 바란다. - 「설문답(設問答)」106) 일부 다른 설문이나 토론 기록에 드러나는 정지용의 평소 말투가 다소 냉소적 인 편이긴 하나, 그것을 감안해도 정지용이 썼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강도 높은 비판이다. 이 글은 “선생은 앞으로 자기 작품에 어떠한 야심을 갖고 계십니까”에 대한 대답이었다. 정지용이 자신의 야심으로 ‘진정한 산문 정신’을 꼽았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마땅히 “문장과 정신”이어야 할 산문 을 속된 “이야기”와 동일시하는 어설픈 “언문일치”란, 일전에 박용철이 임 화에게 ‘시는 변설이 아니’라고 반박한 일을 떠올리게 한다. 여하튼 이때 정 지용은 어느 때보다 ‘진정한 산문’을 쓰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문장과 정신”을 짝지어 언급하는 대목은 마치 『문장』 지의 존재 이유를 대변하는 것만 같다. 『문장』은 ‘진정한 산문정신’을 실현하기에 좋은 처소가 되어주었다. 정 지용은 ‘연작 시론’이라 할 만한 일련의 시론들(「시의 옹호」, 「시와 발 표」, 「시의 위의」, 「시와 언어」)을 모두 『문장』에 발표했다. 그 중 「시와 발표」는 그 주제와 수사법이 「시적 변용에 대해서」와 가장 유사 한 글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시론을 통해 일 년 전 죽은 걸출한 비평가 의 존재를 환기하는 ‘추모적 창작’, 혹은 ‘문학적 추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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