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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문장 특유의 느슨한 유파성 본문

국어국문학, 풍월을 읊다

정지용 문장 특유의 느슨한 유파성

②℃ 2020. 9. 2. 12:00

정지용이 『문 장』에서 다름 아닌 박용철을 간접적으로나마 호명할 수 있었던 데에는 『문장』 특유의 느슨한 유파성107) 탓에 배타적인 분위기가 비교적 옅었다 106) 『작품』, 1939.6 - 52 - 는 점, 108) 그리고 위의 설문답에서 드러나듯 산문정신을 향한 정지용의 열 망이 『문장』의 지향점과 엇갈리지는 않았다는 점 등이 크게 작용했을 것 이다. 시기적으로 가장 앞서는 시론은 아니지만, 박용철을 향한 추모와 산문정 신에의 열망이 교차하는 지점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판단되는 「시(詩)와 발표(發表)」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직 예술 문화의 순수와 영구 를 조준하기 위하여 시는 절로 한층 고고한 자리를 잡지 않을 수 없는 필 연성에 집착할 뿐이다”와 같은 「시와 발표」문장을 보더라도, 이 글이 「시적 변용에 대해서」의 주제를 환기하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시를 쓰기 위한 필연성’이란 핵심 개념을 계승하고 있고, 그것은 시의 ‘고고한 자 리’를 향해야 한다고 지적하는데 「시적 변용에 대해서」에 달린 부제가 바 로 “서정시의 고고한 길”이었다는 점을 상기할 만하다. 다음과 같은 구절은 박용철의 시론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한층 더 구체화한다. 107) “『문장』파는 선연한 이념을 제시하고 나섰던 카프와 같은 유파가 아니라 이 태준과 사주 김연만의 사적 관계를 기반으로 삼아 출발하였으며, 이태준·이병 기·정지용의 개인적 문단적 교류 관계가 잡지 발전의 중요한 매개 역할을 했던 ‘자연발생적’ 유파였다. 이 점에서 『문장』은 구인회와 상통하는 면이 있다. 실 제로 『문장』은 구인회의 친분 관계를 이어받고 있는데, 김환태가 바로 그 중요 한 예다. (…중략…) 이렇게 구인회와 『문장』파는 보성고보나 도시샤대학의 지적 분위기, 인적 교 류관계, 그들 사이의 공통적 심정 또는 취향 같은 것이 접착제 역할을 한 독특 한 문학 ‘유파’였다.” 방민호, 「김환태 비평과 『문장』의 위상학」, 『일제 말기 한국문학의 담론과 텍스트』, 예옥, 2011, 155~158쪽. 108) 한편으로는 『문장』이 느슨한 유파성에도 불구하고, “고전과 전통이라는 또 하나의 전위적 양식”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구인회 안팎에 포진되어 있던 현대 적 스타일리스트들의 연장선으로 기능했다는 관점도 있다. 손유경은 구인회에 서 『문장』으로 이행하는 과정이 “노선을 바꿔서 상고주의자로 돌아선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즉 이들의 관계는 단절보다 일관성이 더 본질을 이룬다. 구인회나 『문장』이나 “‘반부르주아 예술=프롤레타리아 예술’이라는 공식을 벗 어나는 미학적 모험”을 감행했다는 측면에서 동질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손유경, 「1930년대 문학의 유산」, 『슬픈 사회주의자』, 소명출판, 2016, 203~204쪽. - 53 - 가장 타당한 시작(時作)이란 구족(具足)된 조건 혹은 난숙한 상태에서 불가 피의 시적 회임(懷妊) 내지 출산인 것이니, 시작이 완료된 후에 다시 시를 위 한 휴양기가 길어도 좋다. ― 「시와 발표」109) 일부 시 쓰기란 수태고지 이후 새 생명을 잉태하는 것과 같다는 「시적 변용에 대해서」의 결론은 여기서 “시적 회임(懷妊)”, 즉 시적인 ‘임신’이라는 개념 으로 변주된다.110) 시작 행위를 회임 및 출산 행위에 비유한 것은 단지 유 기체론적인 시론에 머물기 위함이 아니라, 뒤에 이어서 언급하는 “시를 위 한 휴양기”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 휴양기가 길어도 좋은 까닭은, 그것이 “정체(停滯)”와는 다르며, 시적 휴양 혹은 휴식은 “생명의 암암리(暗暗裏)의 영위(營爲)”, 즉 어둡고 조용한 곳에서 행해지는 ‘생명’적 행위에 가깝기 때 109) 정지용, 『정지용 전집 2:산문』, 최동호 편, 서정시학, 2015. (이하 정지용의 모든 산문은 여기에서 인용) 110) 『정지용시집』(1938)의 표지화가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1387~1455) 가 그린 「수태고지」(1433~1434)라는 작품의 일부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이에 대해서는 전세진(2017)의 연구가 유일하게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소래 섭은 『정지용시집』에 나타난 표면적 불협화음을 규명하는 작업(소래섭, 「『정지 용시집(鄭芝溶詩集)』에 담긴 박용철(朴龍喆)의 의도와 구인회(九人會)의 흔적」, 『어문연구』 Vol.46 No.2, 한국어문교육연구회, 2018)에 표지화의 문제를 연결 시킨다. 수태고지 모티프를 박용철과 정지용이 어느 정도 공유했다는 점에는 동의하면서도, 둘 사이의 연결고리보다는 충돌지점이 두드러졌다는 게 이 연구 의 요지이다. 당시 시집 편집을 보다 주도했던 쪽은 박용철이므로 표지화를 선 정하는 데에도 박용철의 입김이 더 셌다고 봐야 하며, 「시와 발표」 역시 박용 철의 시론과 비슷한 점이 보이긴 하나 시기적으로도 차이가 있고 글의 구체적 인 취지도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소래섭의 결론에 동의하기 어 렵다. 「시적 변용에 대해서」와 「시와 발표」 사이의 시간적 거리는 정지용이 스 스로 말한 ‘시적 휴양’과 조응한다고 봐야 한다. 단지 시기적으로 다르기 때문 에 차이가 두드러진다고 한다면 그의 금강산행과 그에 관한 기록 사이에도 존 재하는 시간적 거리가 제대로 설명되지 못한다. 또한, 「시와 발표」에 나타난 ‘시적 회임’은 다작(多作)을 경계하는 내용에 불과하다는 분석도 세밀한 검토가 수반되어야 한다. 텍스트를 잘 살펴보면 오히려 다작을 경계하는 조언은 핑계 에 가깝고 글의 후반부로 갈수록 「시적 변용에 대해서」의 주제를 구체화하고 있다. ‘시적 휴양기’와 관련된 ‘체험’, 즉 박용철이 릴케를 인용하여 말한 ‘기다 림’을 뒷받침하는 개념에 가깝기 때문이다. 글의 결론처럼 등장하는 “생명의 검사”라는 표현 역시 「시와 발표」를 단조롭게 읽어내는 관점에 강력한 반증으 로서 작용한다. - 54 - 문이다. 따라서 시인은 겸허히 휴양기를 받아들이고 ‘기다림’에 충실해야 한 다. 시를 생명의 잉태와 동일시하는 관점은 릴케에게서도 특징적으로 드러 난 것이었다. 모든 것은 산(産)달이 되도록 가슴속에 잉태하였다가 분만하는 것입니다. 모 든 인상과 느낌의 모든 싹이 완전히 자체 속에서, 어둠 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속에서, 무의식 속에서, 우리 자신의 이성으로 도달할 수 없는 것 속에서 완성에 이르도록 내버려두십시오. 그러고 나서 깊은 겸손과 인내심을 갖고 새로운 명료함이 탄생하는 시간을 기다리십시오. 111) ― 릴케, 「세 번째 편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릴케가 누누이 강조하는 ‘내면으로의 집중’과 자발적 ‘고독’이란, 생명을 잉태하기까지 산부가 겪는 오랜 인내의 시간과 다르지 않다. 릴케와 마찬가지로 박용철과 정지용이 ‘시적 기다림’을 중시한 데에는 ‘시’라는 장르 특유의 ‘치열함’을 역설하려는 의도가 배어 있 다. 그런데 정지용이 생각하기에 시는 산문과 달리 “의무로 쓸 수” 없다. 시 는 꽃이 피고 아이가 태어나는 필연적 자연 현상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즉 정지용은 ‘인위성이 제거된 치열함’이란 역설을 시론을 통해 주장하고 있으 ▲ 프라 안젤리코, 「수태고지」(1433~1434) 111)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31쪽. - 55 - 며, 이러한 역설은 내면으로부터의 필연적 요구와 시적 기다림의 과정을 거 쳐 가능해지는 것이다. 정지용은 「수수어 2」(조선일보, 1937.6.9.)에서 청 탁을 받아 마감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저널리즘적 글쓰기에 대한 반감을 드 러낸 바 있다. 마감 시간까지 글을 써내지 않으면 “너의 목이라도 갓다 바 치고 대령하라는” 협박하는 것과 같은 윤전기(輪轉機) 112)는 시적 휴양과 회 임을 허용하지 않는 글쓰기, 즉 저널리즘적 산문과 ‘변설’을 대변한다. 여기 서 정지용은 시와 산문의 비교를 통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시정신’과 ‘산 문정신’을 동시에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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