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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 진보적인 생명을 지닌 독특한 낭만주의 방법 채택 본문

국어국문학, 풍월을 읊다

신시, 진보적인 생명을 지닌 독특한 낭만주의 방법 채택

②℃ 2020. 9. 2. 07:00

실제로 그는 두 번째 기교주의 비판인 「기교파와 조선시단」80)에서 20년대 신시가 “진보적인 생명”을 지닌 “독특한 낭만주의”의 방법을 채택했다며 상찬하는 모습 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기교주의의 대표로 호출된 정지용 역시 신시와의 비 교를 통해 비판받는다. 임화는 정지용을 “‘슬픔’을 보복의 뜨거운 불길로 고 치지 못하는 시인”으로 취급하며 서슴없이 공격하는데, 신시는 현실 도피였 을지언정 적어도 기교파와 달리 내용, 즉 ‘깊이’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78) 김학동, 『정지용연구』, 민음사, 1987, 237쪽. 79) 김초희, 「정지용 문학의 감각 연구」,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석사학위 논 문, 2004, 14쪽. 80) 『조선중앙』 28호, 1936.2 - 35 - 박용철은 임화의 주장이 지닌 다수의 문제점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지 만, 그중에서도 시를 ‘변설(辯說)’, 다시 말해 옳고 그름을 따져 설명하는 행위와 같은 것으로 파악하는 관점은 전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을해시단 총평」에서 가장 압권은 정지용의 「유리창」 원문을 직접 인용한 후 그것 을 임화가 주장한 ‘변설’의 양식으로 손수 개작한 「유리창」의 모방작과 비교하는 대목이다. 둘 중 어느 것이 ‘시’에 더 가까운지 직접 확인해보라는 박용철의 직설적인 비판이었다. 이를 통해 카프 시의 ‘변설’은 사실상 이전 세대의 감상적 낭만주의의 전형임이 자연스럽게 입증된다.81) 박용철은 이렇 게 첨언한다. 그러나 시인 정지용은 아마 죽여도 이렇게 애호(哀號)하고 호소(呼訴)하려하 지 아니할것이다. 그는 이러한 생생한 감정을 직설적으로 노출하는것보다는 그 민민(悶悶)한 정(情)을 그냥 씹어삼키려했을것이다. 그래서 그는 좁은방 키와나란한 들창에 붙어서서 밖에 어둔밤을 내다보며 입김을 흐리고 지우고 이렇게 작난에 가까 운일을하는것이다. 유리에 입김과 어둠과 먼별이 그의 감각(感覺)에 미묘(微 妙)한 반응을이르킨다. 이때에 문득 진실로 문득 방황하든 그의 전감정(全感 情)이쏠려와서 유리에 정착(定着)이된다. (강조: 인용자) ― 박용철, 「을해시단총평」 「유리창」이 단순한 ‘변설’과 다른 이유도 감정과 감각이 “미묘한 반응” 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시적 언어를 빚어내면서 내적인 감정과 감각이 하나 로 응축되는 일련의 과정을 이른바 ‘변설’론은 설명할 수 없고, 이는 곧 시 의 근본적인 메커니즘을 설명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박용철은 여기서 도 “전감정(全感情)”이란 용어를 동원하고 있다. “전생리(全生理)”에 이어서 그가 고집하고 있는 접두어 ‘전(全)’는 시와 시인에 대한 박용철의 사유를 잘 드러낸다. ‘전체’로서의 통합은 내용과 형식의 결합, 혹은 계급주의와 기 교파의 결합 따위가 아니라 시의 창작 과정에서 먼저 발생하는 선결 과정이 81) 강계숙, 앞의 논문, 234쪽. - 36 - 다. 그래서 ‘전(全)’의 사유는 시론을 넘어서 인식 주체에 대한 현상학적 관 점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현재인식(現在認識)의주체(主體)란 지나간인식(認識)의내부기억(內部記憶) 의 총화성(總和成)인 한전일체(全一體)이며 한개의 존재(存在)에 대한 개인의 인상은 제각기 상이한것이나 그 상이한 가운대의 공통성(共通性)이 우리의 공 동감상(共同鑑賞)의 기초가 되는 것이니 이 공통성의 규정이없다면 비평(批評) 은 성립불가능이 될것이다 비평은 자기(自己)를감수공통성(感受共通性)의 한 표준으로가정(假定)하는데서 출발한다. (강조: 인용자) ― 박용철, 「『시문학』 창간에 대하야」82) 박용철은 『시문학』 창간의 의의를 밝히면서, 시뿐만 아니라 비평의 존 재 가치를 적극적으로 해명한다. 83) ‘현재인식의 주체는 지나간 인식의 내부 기억의 총화성’ 84)이므로 사물에 대해 각기 상이한 인상을 받음에도 그 ‘내 부’의 공통성이 비평의 성립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이때 ‘전일체(全一體)’ 란 표현이 주목된다. ‘새로운 시’의 성패 여부를 판가름하는 시인의 ‘전생리’ 는 감각·감정·지성을 포괄할 뿐만 아니라, 삶을 살아온 시간으로 쌓인 ‘기억’ 들의 ‘전일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후 박용철이 「시적 변용에 대해서」에 서 시적인 ‘기다림’의 가치를 역설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컨대 박용철의 이러한 사유들은 기교주의 논쟁에서 임화·김기림과 대립 82) 『조선일보』, 1930.3.5 83) 이는 역시 박용철이 쓴 글로 추측되는 『시문학』 창간사에서 미처 풀어내지 못한 내용을 다른 지면에서 보충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창간사에서는 『시문 학』 이 시 전문지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기 위해 다른 말을 아끼고 격정적 어조 를 유지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정지용·김영랑 등 자신보다 더 ‘시인’에 가까 웠던 문우들을 향한 배려가 돋보인다. 84) 이 구절은 특히 의미심장한데, 앙리 베르그손(Henri Bergson, 1859~1941)의 『물질과 기억』에 실린 ‘역원뿔 도식’과 그에 대한 설명을 연상시키기 때문이 다. 베르그손은 이 도식에서 원뿔SAB를 ‘나의 전체 기억의 총체’라고 했다. 박 용철의 ‘주체’론이 지닌 현상학적 일면에 대해서는 따로 긴 논의가 필요해 보 인다. Bergson., Henri, 『물질과 기억』, 박종원 역, 아카넷, 2005, 258~262쪽 참 조. - 37 - 각을 세우면서 더 명징한 색채를 띠게 된다. ‘전(全)’의 사유는 이미 30년대 초반에 확립되었으나 그것을 시적 메커니즘에 들어맞는 용어로 다듬었던 것 은 아니었다. ‘종합’에 대한 임화와 김기림의 문명사적 관점이 노출하는 비 평적 한계는 이러한 사유가 ‘전생애’ 혹은 ‘전감정’ 등의 술어로 구체화하면 서, 기교주의 논쟁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정지용 시의 본질을 옹호할 수 있 게 된 것이다. 정리하자면 기교주의 논쟁은 필연적으로 ‘기교/기교주의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수반하며, 이 질문은 ‘기교’와 유의어 관계에 있는 ‘기술’에 대한 사 유를 건드리게 된다. 기술이란 이 논쟁에서 ‘언어의 운용’과 다름 아닌 바, 임화와 김기림은 보다 깊이 탐구되어야할 시와 언어의 문제를 내용-형식이 란 이분법으로 봉합하면서, 논쟁의 초점을 시의 발전사로 이동시킨다. ‘내 용’의 항목에 감정이 배당되면 낭만주의 시가, 이념이 배당되면 경향시가 된다. 박용철은 이러한 이분법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며 ‘표현’과 ‘기술’의 의 미를 재구한다. 시인의 시적 기술이란 검술에 비견될 정도로 진중한 ‘테크 닉’이다. 박용철은 ‘기교’란 적(敵)을 두기 전에 ‘기술’이란 시의 근본 메커 니즘에 대해서는 얼마나 엄밀을 기하고 있는지 두 논자에게 묻고 있었던 것 이다. 그러나 시의 연금술적인 측면, 즉 특정한 내용을 형식화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존재를 다른 존재로 변이시키는 시의 마력은 ‘테크닉’으로서의 기술 개념으로 온전히 해명될 수 없었다. 그래서 박용철 역시 “기술에는 최후까 지 법칙화해서 전달할 수 없는 부분이 남는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한다. 기 교주의 논쟁에서 드러난 박용철의 견해는 구체적인 시론이라기보다, 시의 본질에 대한 일련의 입장문과도 같은 성격을 지닌다. ‘덩어리’, ‘존재’, ‘체 험’, ‘변용’ 등 몇 가지 의미심장한 개념들이 출몰했지만 이에 대한 부연설 명은 덧붙여지지 않았다. 이후 박용철은 마지막 평론 「시적 변용에 대해 서」를 통해 일전에 자신이 흩뿌려놓았던 개념들을 거두어 모아, ‘법칙화할 수 없는 부분’을 다시금 설명하고자 시도한다. ‘기술(技術)’ 논의가 ‘어떻게 쓰는가’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면, 「시적 변용에 대해서」에 이르러 박용철 은 ‘무엇을 쓰는가’에 대한 답을 내놓는다. - 38 - 2.2. 내적 필연성으로서의 ‘무명화(無名火)’와 ‘기술(奇術)’로 서의 변용 앞서 2.1.에서는 기교주의 논쟁에 참여한 박용철·김기림·임화의 입장을 시 적 ‘기술(技術)’이란 쟁점에 초점을 맞추어 정리해보았다. 이 ‘기술’이란 당 대 문학 담론에 있어서 ‘시적인 것’의 의미 범주를 구성해나가야 하는 논자 들의 공통적인 사명과 결부되어 있으면서, 각자의 사상과 입장이 끊임없이 교섭하는 한복판에 위치하던 쟁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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